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 운영자 | 2024-06-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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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전두환은 1980년 8월 21일부터 1981년 2월 24일까지 7개월 동안 최규하의 잔여 임기를 채웠다. 그리고 유신 헌법에 보장된 7년 동안의 임기인 1981년 2월 25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제 12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가 취임했을 때 한국 경제는 임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세계는 예외 없이 1974년의 제1차 오일 쇼크에 이은 제2차 오일 쇼크에 휩싸였다. 빚이 많은 기업들은 고환율에 시달렸다. 도매물가 상승률이 44.2%, 자고나면 물가가 오르니까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너도나도 사재기를 했다. 사재기를 하니까 상품과 곡식이 품귀현상을 일으켜 물가는 더욱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경제가 ’한강의 기적‘ 이라는 명성을 얻자 해외 은행들은 한국기업이 꿔 달라면 달라는대로 마구 꿔줬다. 기업들은 대개 기계를 사용하는 조립기업들인데다 공단에 옹기종기 몰려있어 서로 질투를 했다. 새로운 제작기계들을 수입하는 데 경쟁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복투자를 하다 보니 생산이 과잉되어 공장 가동률이 10% 이내로 추락 했다. 이웃에 자랑했던 비싼 기계들이 애물단지가 되었다. 돈이 벌리지 않는 기업들은 외채를 갚을 능력이 없어 외채를 얻어 이자를 갚는 처지들이 됐다. 기업에는 돈이 고갈되고, 개인들은 사재기에 돈을 써버리기 때문에 저축이 없었다. 저축이 없으니 기업들은 한국의 은행에서 돈을 꾸지 못하고 외국은행에서만 돈을 꾸어썼다. IMF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 말기의 한국경제였다. 경제를 아는 모든 식자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로 이런 경제의 임종시기에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올라섰다. 그는 육사 생도 시절에 축구 선수였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경제를 알겠느냐고 걱정들을 했다. 군 출신이 물이 빠진 경제를 무슨 수로 건져올릴 수 있겠느냐, 한참 걱정들을 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어이없게도 88 국제올림픽을 유치하겠다며 팔을 걷어 부쳤다. “석두야, 석두~ 미치지 않고서야~ 에휴~ 답답해…” 하지만 그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드디어 그는 만세를 불렀다.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남쪽도시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로, 서울을 88올림픽 개최지로 선포한 것이다. 전두환은 환희에 차 있었지만 주위의 모든 참모들과 각료 들은 감당할 대책이 없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전두환에게 대책은 있었는가? 도대체 무슨 돈으로, 도대체 무슨 실력으로 경제를 극복하고 그 많은 투자비를 마련하겠다는 말인가! 1981년 1월 20일, 전직 영화배우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두환은 레이건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너무나 엉뚱해서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가까이 지냈던 초대 연합군사령관 베시 대장에게 간곡히 부탁해 레이건을 빨리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전두환은 레이건을 유혹하기 위해 두가지 낚싯밥을 전했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해왔던 핵무기 개발을 일체 중단하고, 핵을 에너지로만 사용하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한했던 자유를 대폭 완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매우 반길 수 있는 미끼였다. 여기에 더해 레이건은 대 공산권 매파였고, 전두환도 대 공산권 매파라 코드가 일치했다. 레이건에게는 ’회색주의자인 카터‘가 어지럽힌 동맹관계를 복원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였다. 수많은 동맹국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모범적인 동맹이 한국이었고, 한국은 미국 외교정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였다. 그래서 레이건은 외국 정상 중 가장 먼저 전두환을 만나기로 했고, 만나는 그 날은 취임한지 불과 13일 만인 2월 2일이었다. “각하, 세계 정상들 중에서 본인을 가장 먼저 만나주신 것은 본인에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각하께서 미합중국 대통령 으로 취임하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각하, 저는 각하를 도와 드리고 싶어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엉뚱한 말에 회담장에 있는 미국사람들은 물론 동행했던 참모진과 장관들 모두가 놀라고 긴장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제까지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원조 액수를 늘려달라, 신형 전투기를 사게 해달라는 등 아쉬운 말부터 했는데, 그런 한국이 무엇을 가지고 미국을 도와주겠다는 것인가? 회담공간에 숨소리조차 멎어있었다. “각하, 죄송한 질문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연간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정상회담에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레이건도 모르고, 그 자리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또 다시 장내는 고요하게 얼어붙었다. “각하, 제가 알아봤더니 연간 800억달러입니다. 그럼 대한민국의 연간 GNP 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또다시 조용해졌다. “600억달러입니다.” 모두가 놀랍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한국의 GNP가 미국의 1개주의 것보다 적다니! “그럼 일본의 연간 GNP는 얼마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몰랐다. 1조 1,600억달러, 한국GNP의 20배입니다.“ “각하, 대한민국은 자유진영의 최일선에서 이 보잘 것 없는 GNP에서 매년 6%를 떼어내 공산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가 거의 파탄날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반면 부자나라 일본은 GNP의 0.09%만 떼어내 방위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분명 땀을 흘리는 대한민국의 그늘에서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의 돈을 달라하지 않습니다. 일본 돈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그 돈으로 저는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도 사고 탱크를 사겠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신선한 충격을 느낀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일단 일본에 각하의 뜻만 알려주십시오. 액수는 실무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이 말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대통령을 수행한 참모진과 장관들이었다. 자기들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돈키호테식 발상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자기들끼리 너무 엉뚱하다며 수근들 댔다. 그 후 2개월이 지났다. 1981년 4월22일, 전두환은 외무라인을 통해 일본 스즈키 수상에게 100억달러 청구서를 보냈다. 일본측 역시 경기를 일으켰다. ”뭐라고? 100억달러?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은거 아냐? 10억달러라 해도 너무 무례하지, 도대체 근거가 뭐야? 무례가 지나치구먼. 대꾸도 하지마“ 전두환 주변에서도 전두환은 매우 엉뚱하고 이상한 사람 이라고 수근댔다. 국제망신이라고까지 했다. 이듬해인 1982년 1월27일에 ’나카소네‘가 수상에 올랐다. 나카소네는 관례에 따라 서둘러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러갔다. 그리고 1년 후인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가 한일 정상회담을 제안해 한국을 방문하여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그동안 일본은 사실 한국에 대해 미안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최소한 60억달러 정도를 마련해보려고 백방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60억달러를 마련 하려면 제 위치가 흔들릴 수 있어서 최대한으로 마련한 것이 40억 달러입니다. 이 돈을 수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8년 전인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받아낸 돈이 8억달러이다. 40억달러면 5배가 아니던가! 나카소네는 전두환보다 13년 연상이다. 이후 전두환과 나카소네는 친구처럼 형제처럼 우정을 나누었다. 전두환이 임기를 끝내자 레이건과 나카소네는 각기 사인이 된 전두환을 초청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런 대접 받은 사람이 우리 나라엔 전두환 말고 없다. 한강은 서울의 아이콘이다. 1965년에 350만이었던 인구가 팽창하여 천만이 되었다. 상수도 소요량이 팽창했지만 그 취수원인 한강은 날이 갈수록 오염이 심화되었다. 공장폐수, 축산폐수, 인분이 유입되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논과 밭으로부터 또다른 축산물의 인분과 퇴비가 마구 유입됐다. 가뭄이 들면 바닥이 드러나 악취가 먼 거리에서까지 진동하고 홍수가 나면 논과 밭이 쓸려나갔다. ’한강종합개발사업‘, 전두환은 일본에서 받은 40억달러 중 10억달러를 털어내 시궁창급의 한강을 오늘날의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바꾸었다. 한강 양안을 따라 54.6km의 초대형 콘크리트 관을 묻어 한강으로 유입되는 모든 오폐수를 통과시켜 중랑, 탄천, 안양, 난지에 있는 하수처리장으로 보내 정화시켰다. 210만평의 고수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유원지, 낚시터, 자연학습장, 주차장, 자전거도로, 산책로, 체육공원 등을 조성하고 강에는 유람선을 띄우게 했다. 수중보를 설치해 한강을 홍수도 없고 가뭄도 없는 평균 폭 1km의 기나긴 호수로 가꾸었다. 88올림픽도로로 명명된 한강변 남로와 북로를 건설하고 수많은 교량을 건설하고 중랑천까지 개발해 그 양쪽을 달리는 중부간선도로를 건설했다. 일본 돈으로 지하철공사를 설치하여 3~4호선을 건설했고, 방대한 올림픽촌과 올림픽공원, 체육촌을 건설 하여 올림픽역사상 가장 성대한 올림픽을 치렀다.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16일 동안 열린 88올림픽에는 자유진영 국가와 공산진영 국가가 모두 참여하여 보이콧 없는 첫 올림픽이 되었다. 160개국으로부터 선수들과 관람객이 모였고, 104억의 세계인들의 시선을 끌어 아름답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도우미들의 친절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공산권의 와해에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했다. 관광객이 늘어나서 김포공항으로는 소화를 하지못해 인천공항을 건설하게 되었다. 국력이 한순간에 팽창된 것이다. 제2의 포항제철, 한국형 원자로! 지금 현재 독자적 핵연료봉과 원자로를 보유한 나라는 미국, 한국, 중국, 러시아 4개국 뿐이다. 한국형 원자로는 외화벌이 수단일 뿐만 아니라 외교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외교수단 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이 원자로의 독자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은 과학계의 불가사의로 통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지도자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1983년 7월, 전두환은 한전, 에너지연구소, 원자력연료주식회사, 한국중공업등을 망라하여 상시 회의체인 ’원자력발전 기술자립촉진 대책회의‘를 가동시켰다. 핵연료 국산화가 첫 목표였다. 한필순 박사가 주도하는 기술팀이 ’중수로‘ 연료 국산화에 쾌거를 올렸다.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가능성을 걸었다. 현장에 나간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적극 지원할테니 ’경수로‘ 연료를 국산화 하시오.“ 전두환은 그의 의지를 한필순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전두환은 한필순을 대덕 공학센터의 센터장자리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 자리를 겸임시켰다. 그를 상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한국중공업 사장인 박정기를 한전사장으로 임명했고, 김성진 박사를 체신부 장관 에서 과기처 장관으로 옮겼다. 박정기는 전두환의 육사 3년 후배였고, 김성진은 동기생 이었다. 에너지연구소가 경수로 원료를 개발하려면 한전으로부터 용역을 받아야하고, 한전의 예산을 배정해주는 권한은 과기부 장관에 있기 때문이었다. 경수로 연료봉 자체개발은 중수로 연료를 개발하는 것보다 한층 더 어려운 과제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밀어 주었기에 경수로 연료봉은 1983년에 완전 국산화가 됐다. 핵연료는 비싸기도 했지만 해외공급업체의 거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자로는 가동되고 있는데 연료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실상 종속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두환이 앞장 선 것이다. 한숨돌린 전두환과 한필순, 1984년에 다시 만났다. 전두환이 한필순을 청와대로 불러 활짝 웃으면서 한필순의 손을 두손으로 감쌌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추켜올렸다. 사실 그러했다. 한필순은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하고 긴장했다. ”한 박사, 한국형 독자 원자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독자기술로 만들 수 없소?“ 이크,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놀란 한 박사, 대답이 궁했다. 사실 이건 100%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각하, 그건 좀...“ 이 표현에 전두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된다는 거요?“ 사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한국기술이 거기까지 가려면 요원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한국 원자력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인식입니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말을 하겠는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눈치 빠른 전두환이 한필순의 마음을 읽고 물었다. ”이보게 한 박사, 포항의 모래바닥에 포항제철을 누가 건설했소?“ ”그어야 박태준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지원으로 건설했습지요“ ”포항제철도 맨땅에 헤딩해서 건설했으면 한국형 원자로도 맨땅에 헤딩하면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한 박사가 할말을 잃었다. ”한 박사가 박태준이 되든지, 박태준을 구해보든지 하시오. 얼마면 되겠소?“ 10년이라 말해도 거짓말 인데, 10년이라고 말하면 곧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네, 5년만 주십시오.“ ”알았소. 적극 지원하겠소. 가보시오.“ 청와대에서 나온 한필순은 지옥문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온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고, 얼굴에 노랑병이 걸렸다. ”청와대 다녀오시더니 왜 저러시나~“ 주위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선임연구원 이병령 박사가 한 박사를 찾아갔다. ”소장님,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한필순이 고민을 털어놨다. 그런데 이병령이라는 젊은 박사에서 당찬 소리가 나왔다. ”에이, 소장님, 아 그까짓거 가지고 웬 고민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 세상에 없는 물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개발한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도 했는데 우리라고 왜 못합니까?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의외의 이 시원시원한 말에 한필순의 노랑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이 박사, 고맙다. 우리 한번 해보자“ 1985년 7월, 프로젝트는 에너지연구소가 한전으로 부터 한국형원자로 개발사업 용역을 받는 단계로부터 출발했다. 에너지연구소가 원청업체가 되어 설계기술을 가진 미국CE(컨버스천 엔지니어링)를 하청업체로 선정하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이병령 박사는 70여명의 과학자들을 인솔하고 미국 CE사에 가서 원자로 설계를 함께 개발했다. 이것이 한국형 원자로가 되었고 이 기술로 영광 3~4호기, 이어서 울진 3~4호기가 건설되었다. 이렇게 피땀으로 개발한 자랑스런 기술을 문재인이 파괴하려고 안간 힘을 썼던 것이다. 전두환은 국가를 건설했지만 문재인은 민주화의 간판을 내걸고, 국가를 파괴했다. 손학규가 가졌던 종교 ”자고 깨면 대한민국을 도끼로 찍어 내릴 궁리만 했다“ 바로 이것이 민주화의 가면 뒤에 숨은 반역의 악마들인 것이다. 북한괴뢰의 공작에 속고 쇠뇌되어 소위 민주화라고 떠벌리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우리나라를 좀 먹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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