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도려내서라도 지우고 싶은 빈자리 | 운영자 | 2024-06-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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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도려내서라도 지우고 싶은 빈자리
메마른 눈을 끔벅이며 살기(殺氣)를 감춘 채 끈적거리는 말투로 속삭이듯 던지는 질문.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죽음의 독이 묻은 질문을 꿀꺽 삼키고 휘청거리는 말을 토하는 여자(女子).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2) 여자가 노출시킨 틈새를 놓치지 않고 지체 없이 쏘는 달콤한 독 묻은 사망의 침.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순간 확산되는 죄악의 사슬. 그 사슬을 족쇄로 달고 살아야 하는 인류 최대의 비극이 전개되는 현장입니다. 지울 것이 없다면 가슴을 도려내서라도 지워 버리고 싶은 비극의 현장입니다. 마음이 더욱 아픈 것은 그 현장에 보이는 아담의 빈자리입니다. 그 빈자리가 없었다면 인류의 비극도 없었으리라는 안타까움이 서러운 눈물로 흐릅니다. 성경은, 아담의 빈자리를 직설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용을 종합하면 빈자리가 보입니다. 뱀이 하와를 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3:4). 만약 그 현장에 아담이 함께 있었다면 그들을 꾀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죄와 벌을 구별하셨습니다. 이는 범죄의 내용이 각각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들어 잉태의 고통을 벌로 받고, 아담은 빈자리를 지키지 못해 평생의 수고를 벌로 받게 됩니다. 아담이 그 빈자리를 지켰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날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와처럼 “죽을까 하노라”는 식으로 빈틈을 보여 사망의 침을 자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뱀의 간교를 다스렸을 것입니다. 결국 ‘반드시’의 말씀이 아담의 빈자리로 인해 희석되었고, 그 빈자리를 뱀이 차고앉아 ‘결코’라는 말로 강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빈자리를 예수님의 족보에서 사라진 역대 왕들이 차지하고 앉아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독사의 족속으로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마 23:33). 그 빈자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구속사(救贖史)의 말씀은 ‘반드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반드시’ 진행되며,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성도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빈자리를 허용한다면, 어둠의 세력은 또 다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희석하여 빈틈을 만들고 사망의 화살을 쏘아댈 것입니다. 따라서 구속사의 말씀을 받은 성도는 제자리를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제자리는 구속사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입니다. 구속사의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가 제자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자리를 비우지 않고 반드시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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