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해방을 위한 토지 개혁 ③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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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해방을 위한 토지 개혁 ③ 이승만 정부는 헌법에 따라 농지 개혁법 제정을 추진했다. 대통령 앞에 놓인 농지 개혁안은 3가지였다.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던 조봉암의 농림부 안, 보수 우파 지주 세력이 장악했던 한민당의 국회 안, 그리고 총리실 산하 기획처 안 등이었다. 토지 개혁은 국민들에게는 해방이었지만, 지주들에게는 기득권의 박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문제였다. 이승만은 3가지 제안을 상세히 검토하고, 국회의 실력자들을 일일이 만났다.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당사자들을 설득하여 적절한 양보를 유도해 냈다. 조봉암의 농림부 안은 토지 보상 문제에서 ‘매수’가 아니라 ‘징수’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문제는 단순한 정책상 차이가 아니라 정치 노선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농림부 안은 세력 싸움에서 밀려 국무 회의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토지 개혁이 공산당 출신의 좌파 조봉암의 작품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잘못 전해진 역사의 한 사례이다.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 안은 아무래도 개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지 개혁법은 기획처 안을 근간으로 해서 1949년 6월 21일에 선포되었다. 법안의 핵심은 농지 소유의 상한을 3헥타르로 정하고, 그 이상의 모든 농지를 지주로부터 유상으로 수용하여 소작농에게 유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률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하자가 드러나, 이 법안은 수정을 거쳐서 1950년 3월 10일 국회에서 개정 법률로 통과되었는데, 제3대 윤영선 농림부 장관 때였다. 이제 통과된 법률을 집행하려면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제정해야 했는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이승만의 타이밍 감각이 발동했다. 그는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저런 규칙과 법규를 따지고 있다 보면 봄철 파종기를 넘겨야 한다. 그러면 또 1년을 허비해야 하고, 국민들은 1년 더 소작농으로 매여 있어야 한다.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주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승만은 비상 수단을 동원했다. 대통령의 특별 유시로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배포해 버렸다. 이미 분배가 예정되었다는 통지를 보냄으로써 토지 개혁을 기정 사실화해 버린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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