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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4) | 운영자 | 2020-0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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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과 서울 수복(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은 병력 75,000명과 함정 260척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총 반격을 감행하여 적을 섬멸한다는 계획으로,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와 협소한 수로로 말미암아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이 어려운 악조건에서도 불구하고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입니다.
① 맥아더 장군의 최초 구상 맥아더 장군 (Douglas A. MacArthur : 1880. 1.26-1964. 4,5)이 인천상륙을 처음으로 머리에 그린 것은 서울이 함락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그가 전선 상황 파악을 위해 한강방어선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서 있을 때였습니다. 맥아더는 서울 시가를 바라보면서 북한군의 주력을 수원(水原) 부근에서 막아 세우는 한편, 1개 사단을 인천(仁川)쪽으로 상륙시켜 적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소규모 작전을 생각한 것입니다. 맥아더는 동경사령부로 돌아오자마자 참모장 알몬드 소장(후에 주한 미 10군단장)에게 작전계획수립을 지시했습니다. 이때 작전명은 ‘블루하트’ D일(D-day)은 7월 22일이었으며, 출동부대는 미 제 1기병사단을 예정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으로서 전선에 최초로 투입됐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5일 오산 북방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전황이 악화일로여서, 긴급하게 제 1기병사단의 제 1진을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계획보다 앞서 7월 12-14일 출진시키고, 7월 18일 포항의 영일만에 상륙시켜야 했습니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 후방을 강타할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어, 9월 15일을 상륙 예정일로 하는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출동부대는 미 본토에서 증원되어 오는 미 제 2보병사단과 미 제 1해병사단이었고 상륙지점은 인천이었습니다. 이때 미 합참에서는 상륙지점으로 인천 외에 군산이나 주문진을 내세웠으나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습니다. 정치적, 심리적, 군사적 이익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천뿐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낙동강 전선의 악화로 제 2사단을 부산에 먼저 보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차질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8월 12일 ‘크로마이트 작전’을 확정시켰습니다. 이어 8월 16일 인천상륙부대로 미 제 10군단을 일본에서 창설했습니다. 군단장은 맥아더, 동경 사령부의 알몬드 소장, 예하 부대는 미 제 1해병사단, 미 제 7보병사단, 그리고 한국해병대와 한국육군 제 17연대였습니다. ② 상륙 불가능한 인천해안의 천연조건들 맥아더의 구상은 미 합참과 미 극동 해군의 심한 반발로 진통을 겪었습니다. 당시 논란의 핵심은, 인천해안의 천연 여건들이 모두 상륙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구불구불하고 협소한 수로 때문입니다. 항구에 이르는 접근로가 협소하고 굴곡이 심할 경우 함대의 기동은 큰 제한을 받게 됩니다. 더구나 3-5노트(knot)의 해류가 흘러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또 서해로부터 인천으로 접어드는 해상접근로에는 크고 작은 섬들과 암초 그리고 해저(海底)의 모래톱(사주, 砂洲)이나 갯벌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천으로 들어가면서 덕적도(德積島)와 영흥도(永興島) 사이에 있는 굴곡이 심하고 좁은 2개의 수로, 즉 서수도(西水島)와 동수도(東水島)라 일컫는 수로만 허용되었습니다. 그나마도 조류의 영향으로 중첩된 위험 때문에 인천을 오가는 모든 선박들은 서수도보다 동수도를 주로 이용하게 됩니다. 둘째, 한정된 진입로 때문입니다. 인천항으로 향하는 서수도(西水島)와 동수도(東水島)는 인천으로의 길목을 확인시켜 주는 팔미도(八美島) 전방에서 합류됩니다. 결국 거기서부터 넓은 갯벌 사이로 뻗은 인천항에 이르기까지의 약 15㎞(약8마일) 사이에는 단 하나의 수로가 있을 뿐입니다. 수만 톤급 해군 대형 함정들이 이러한 좁은 진입로를 이용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간만(干滿)에 따라 3-5노트(knot)의 조류가 가속 또는 감속하는 이 좁은 수로에서, 만약에 한두 척의 함선이라도 좌초하거나 또는 침몰당한다면 그 앞뒤의 함정들은 회전도 못하고 기동 공간에 제한을 받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수로를 통해 함정들이 야간 운항을 한다는 것은 지상 전투에서 흔히 말하는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는 경우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셋째,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인천의 조석차(潮汐差) 때문입니다. 상륙 함선들이 해안에 접안(椄岸)하려면, LCVP· LCM 등의 상륙 주정은 최소 7m LST는 8.8m의 수심을 필요로 하는데, 조석차(潮汐差)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심하다 (10.3m)는 인천의 경우에는 월 1회 정도 길어야 3-4일밖에 안 되는 기간에, 그것도 만조 때에만 가능할 뿐이었습니다. 바닷물의 높이가 상륙하기에 충분할 만큼 민물이 꽉 들어차는 날은, 1950년 9월에는 단 한 번, 15일부터 18일 사이였습니다. 단 한 번의 때를 놓치고 나면 10월 11일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9월 15일 만조 시간은 일출(日出) 45분 뒤인 06:59, 그리고 일몰(日沒) 37분 뒤인 19:19이었습니다. 실제로 상륙을 하는데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침 3시간과 저녁 3시간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오전의 만조 때로 상륙 시간을 잡고 작전을 준비하려면, 좁고 험난한 수로를 야간 기동으로 해군 함정들이 통과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인천 해안은 세부적인 검토를 더할수록 여러 가지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넷째, 상륙 해안의 악조건 때문입니다. 인천에는 대형 함정들이 상륙하기에 적합한, 해안다운 곳이 없습니다. 인천 외항(外港)은 화력지원을 위한 대규모 함대가 정박하기 협소하고 대부대 병참지원에 필요한 하역 능력이 미흡했습니다. 그나마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라고 하면, 세 곳을 들 수가 있었는데, 실제 작전에서 적색· 청색· 녹색 해안으로 각각 지정되었습니다. 월미도 양편으로 멀리 분리되어 있는 적색과 청색 해안은 거리로도 약 4㎞가 되며, 그 사이에 있는 내항(內港)에는 내외의 두 갑거(閘渠 : Tidal basin)에서 이어지는 수몰(水沒) 방파제와 월미도 사이의 좁은 관문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적색 해안에서는 돌격 상륙부대가 LCVP(상륙 주정)로부터 높은 암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사다리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청색 해안은 만조 때에도 그 수심이 낮기 때문에 상륙 주정 운용상 제한을 받아 LVT(수륙 양용차)를 사용해야만 했는데, 염전 남쪽으로 이어지는 벌거숭이의 작은 야산과 암벽으로 이루어진 이 해안 역시 내륙 쪽에는 공장 지대가 가로놓여 있어서 출구가 제한되었습니다. 다섯째, 요새화된 월미도 때문입니다. 좁은 수로를 통과하여 가까스로 인천항에 접근하면 눈앞을 가로막는 월미도가 나타납니다. 인천 본토와 방파제로 연결된 이 월미도는 남쪽의 소월미도(小月尾島)와 이어져 그 배후에 소규모의 내항(內港)을 형성합니다. 월미도는 당시 동굴화(洞窟化)된 무수한 포진지와 참호들로 요새화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적의 포진지를 사전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 손실이란 막중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새화된 적의 포진지들을 제압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다, 사전 포격을 할 경우에는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상륙작전의 기습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 까다로운 인천항의 악조건 때문에 “이왕이면 안전도가 높은 군산이나 아산만이 어떤가”라고 하며 맥아더의 재고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8월 23일 오후 5시 30분,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을 때, 미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이 급파한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미 해군참모총장, 미 해병대의대표는 상륙지역을 인천으로 결정한 것은 절대 반대한다며 맥아더의 재고를 다시 촉구하였습니다. 맥아더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장장 45분에 걸친 즉석연설로 대신했습니다. “나는 우리 인류의 정의와 자유가 아직도 확고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신념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입증해 보이기 위해 이 모험을 단행하려는 것입니다. 북한군은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하여 서울에서 신속히 차단할 수 있으며 모든 전투부대는 낙동강 일대에 투입되어 있어 서울 방어에 전력할 수 없어서 신속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미 제 8군단은 망치가, 제 10군단은 모루(철침)가 될 것입니다. 또한 북한군이 인천을 지리적 곤란성 때문에 상륙 불가능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기습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해야만 합니다. 나는 적을 분쇄하고야 말겠습니다. 우리 장병 10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이 계획을 어찌 바꿀 수 있겠습니까.”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숙연히 경청하였고, 마침내 8월 28일 미 합동참모본부가 이 계획을 승인하여 8월30일 맥아더가 명령을 하달했으며, 상륙날짜(D일)를 9월15일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완전히 승인되기까지는 또 다른 진통의 과정이 있었으며, 9월9일 미 합참은 마침내 맥아더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맥아더는 명백히 상륙에 적합하지 않은 인천항의 천연조건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기습의 성공을 약속해 주는 유리한 조건이 된다고 하는 굳건한 확신에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은 참으로 쉽지 않은 작전이었습니다. 미 제 1상륙전대의 함포 지원 장교 캡스 소령은 “우리는 생각해 낼 만한 일체의 천연적· 지리적 장애물 일람표를 작성했는데, 인천은 바로 그 모든 장애물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미 해군·해병 장교들의 고충을 극적으로 대변해 주었습니다. ③기동부대 작전계획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7합동상륙기동부대를 구성하고 제 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을 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이 합동기동상륙부대는 90공격기동부대, 92공격기동부대를 포함해 임무별로 모두 7개 기동부대로 편성됐습니다.
이 7합동상륙기동부대는 미 해군 함정을 비롯해 영국ㆍ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ㆍ프랑스ㆍ네덜란드 등 총 260여 척의 함정으로 편성됐으며 한국해군에서도 초계함(PC) 4척과 소해정(YMS) 7척 등이 참전했습니다. 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작전명령은 9월 3일 하달됐는데, 이 계획의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7합동상륙기동부대 기함(로체스터 호)의 통제 하에 해병사단 항공기, 미 공군기, 영국 공군기가 항공모함에서 최대의 항공지원을 제공한다. 상륙장소로부터 48㎞의 지역을 합동기동부대의 목표지역으로한다. 해상작전단계에서 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지휘소는 로체스터 호(USS Rochster), 도일 제독(Rear A으. James H. Doyle :90공격기 동부대장)의 지휘소는 마운트 맥킨리(Mt. McKinley) 호에 둔다. 상륙 해안은 월미도 북단, 인천북단, 해안벽 지역, 인천남단 갯벌지역 등 3곳을 선정하고 이를 순서대로 녹색해안, 적색해안, 청색해안으로 명명한다. 상륙시간은 9월 15일 아침 만조시간 오전 6시 30분을 L시, 오후 만조시간 오후 5시 30분을 H시로 한다.” 공격개시 열흘 전부터 일주일 동안 미 극동공군, 해군항공대, 해병항공대는 서울-인천지역의 상공에서 제공권을 확보하고 적을 고립시켰습니다. 상륙공격 개시 사흘 전부터는 미 제 10군단 전술항공대가 모든 항공작전에 대한 지휘통제권을 이어받아, 목표지역에 대한 적의 통신연락 및 보급지원을 차단하는 동시에 상륙작전부대에 대한 근접화력지원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미 해병대 제 1사단을 상륙돌격부대로 하여 인천항에 상륙, 인천항만 해안두보(海岸頭堡)를 확보하고, 김포비행장 확보, 그리고 한강도하 및 서울 탈환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④ 덕적도ㆍ영흥도 상륙작전(1950년 8월 18일-9월 14일) 인천상륙작전의 전초전으로 도서(島嶼: 크고 작은 온갖 섬) 거점을 확보하고 유엔 상륙기동함대의 인천수로 안전항해를 보장하기 위하여, 한국 해군함정(701, 702, 704, 513, 301, 307, 309, 310, 313)의 함포지원과 이들 함정 승조원으로 편성된 육전중대(중위 장근섭)가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 8월 20일 영흥도를 탈환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23일에는 함정요원으로 편성된 육전중대 요원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함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해군 어청도 이동기지 육전대(병조장 한봉규)가 상륙하여 청년 의용대를 조직하고 도내 치안을 확보하던 중, 9월 14일 저녁 선재도로부터 기습 상륙한 북한군 1개 대대병력과 치열한 공방전을 감행하여 이를 격퇴시키고 영흥도를 사수하였습니다. 이처럼 해병대가 아닌 해군함정 요원들이 단독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 치하의 영흥도를 확보함으로써, 8월 24일 상륙한 한국 해군 첩보팀(소령 함명수)과 9월 1일 상륙한 미 극동군 첩보팀(클라크 해군대위)의 상호 유기적인 협조 하에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접근 수로정보와 경인지역의 적정 등 첩보를 수집 제공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클라크 대위와 해군들에 의해서 밝혀진 팔미도 등댓불은 제 7합동상륙기동부대 함정들이 인천해역에 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⑤ 9월 14일까지 인천으로 집결 상륙일자가 다가오자 제 7합동상륙기동부대는 부산, 일본의 사세보, 고베, 요코하마에서 상륙군을 승선시키기 시작하여 9월 11일부터 인천을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제 7합동상륙기동부대 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은 기함 로체스터 호로 9월 12일 사세보에서 출항하였고, 맥아더 장군은 제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그의 작전참모 라이트 준장, 태평양함대 해병사령관 세퍼드 중장 등과 같이, 제 90공격기동부대 사령관 도일 해군소장의 기함인 마운트 맥킨리 호에 승선하여 이날 밤 사세보항을 출항하였습니다. 미 제 1해병사단은 고베에서 9월 11일에, 미 육군 제 7사단은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에, 미 제 5해병연대와 한국해병대는 9월 12일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모든 함정들이 9월 14일까지는 서해 중부 해상의 약정된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Point California)에 집결하였습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은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여러 가지 기만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기습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습니다. 미국 매스컴에서도 10월 이후에 반격이 개시되고 그와 동시에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할 것 같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렇게 10월 이후에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9월 15일이라는 상륙일을 기밀로 하고,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반복 시사함으로써 “인천이 아니다.”라는 인상을 주어, 북한으로 하여금 “인천은 양동작전이고 주 상륙은 군산으로 할 것이다.”라는 오판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미 해병 5연대가 부산에 집결해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군산을 모델로 예행연습을 함으로써, 아군에게까지도 “상륙지점은 군산이다.”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9월 14일 군산 해안 주변의 주민들을 철수토록 종용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군산 주위 50㎞ 이내 지역에 항공 폭격을 가했습니다. ⑥ 제 1단계 : 월미도 상륙작전(녹색해안) 인천의 관문 월미도(月尾島)는 해발 105m, 넓이 0.6㎢의 작은 섬으로 인천부두와는 약 600m의 둑으로 이어져 인천의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섬의 확보는 인천상륙작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 사항이었습니다. 월미도에 대한 공격준비 사격은 9월 10일 해병대의 전투기 공격으로 시작되어 기동함대의 해군기가 공격을 계속하였고, 13일 부터는 각종 함포의 사격으로 북한군의 방어력을 약화시켰습니다. 9월 15일 자정, 미 해병 5연대 3대대는 상륙명령이 떨어지자 17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9대의 전차와 함께 새벽 02:30에 수로를 따라 진격하였습니다, 뒤이어 함포지원부대 19척이 월미도 가까이 진격하였습니다. 새벽 05:45에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기가 목표를 강타하고 이어서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공격준비를 위한 함포 사격을 집중하는 동안,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 1파가 06:33 녹색해안에 전차 9대와 같이 상륙하였습니다. 월미도 일대의 북한군은 소련제 76㎜포로 장비된 제 918해안포연대의 2개 중대로 증강된 제 226연대의 일부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아군의 항공ㆍ함포 사격으로 궤멸하여, 상륙부대의 상륙 시에는 일부만 저항했을 뿐입니다. 제 3대대는 새벽 06:55에 월미도 정상에 성조기를 꽂았고, 오전 08시에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오전 11:15에는 G중대가 소(小)월미도까지 탈환하였습니다. 즉시 미 공병대가 부교를 가설하고 장비와 병력이 신속하게 상륙하였으나, 1시간도 못되어 바닷물이 빠져나가 함대도 바닷물과 함께 밀려나가고 말았습니다. 오후 해질 무렵 다시 물이 차기까지 월미도에 상륙한 해병 3대대는, 북한군이 공격해 올까봐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오후 4시 물이 들어올 때까지 총알 한 발 쏘는 북한군이 없었습니다. 월미도 상륙작전 시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뿐이었고,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 150여명이 매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⑦ 제 2단계 : 인천항 상륙작전(적색해안, 녹색해안) 9월 15일 16:45에 미 제 1해병연대의 제 1파로 구성된 18대의 LVT(A)가 만조가 시작되자,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을 인천 수로를 따라 인천항에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ㆍ적색해안(red beach) 상륙 한국해병대 3대대를 배속 받은 미 제 5해병연대 제 1, 2대대는 상륙주정(LCVP)에 탑승하여 상륙돌격을 개시, 제 1파(LCVP 8척)가 17:33에 적색해안에 상륙을 시작하여 20:00까지 주어진 목표를 확보하였습니다. 상륙 동안 밀물이 점점 불어가고 있었으나 해안 벽이 상륙주정 (LCVP) 램프보다는 1m 이상 높아 사다리를 놓고 해안 벽을 넘었습니다. ㆍ청색해안(blue beach) 미 제 1 해병연대의 상륙장갑차에 탑승하여 상륙돌격을 개시 제 1파(LVT 9척)가 17:32에 청색해안에 상륙을 시작으로 16일 01:30까지 주어진 목표를 확보하였습니다. 이 작전에서 상륙돌격부대의 피해는 전사 21명, 부상자 174명이었고, 북한군 포로 300여 명을 생포하였습니다. 9월 16일 한국해병대 제 3대대는 15일 저녁 8시 적색해안에 후속 상륙하여 인천 시가지에 가로놓인 경인철도를 경계로 그 남쪽의 응봉산 일대와 도심지역의 적을 소탕하였고, RM 외곽 즉 경인철도 북쪽의 공장지대를 제 1대대가 담당하였습니다. 16일 밤까지 상륙부대들은 해안두보선(BHL)에 진출했습니다. 9월 17일 작전지역 소탕작전을 병행하면서 미 제 1행병사단은 북방과 동방으로 분진(奮進)하고 있었습니다. 미 제 5해병연대는 김포 비행장 전방에서 인민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김포비행장을 19:00에 점령하여 한강 서남안에 도착하였고, 동진(東進)부대는 소사에 돌입하였습니다. 인천을 방어하던 북한군의 주력은 서울 방면으로 도주하였습니다. 9월 18일 북한군의 치열한 저항을 물리치고 오후 9시 40분 북한군 200여 명을 사살하고 행주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인민군 18사단 22연대가 뒤늦게 왜관에서 북상하여 구로와 영등포에서 저항하였으나 300여 명의 시체를 남기고 도망쳤으며, 인민군 9사단 87연대가 영등포 방어를 위해 김천에서 9월 20일 도착하였으나 미 해병 11포병대의 공격에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포비행장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매일 400톤의 군수물자가 착륙하였고, 미 제 10군단의 후속부대인 제 7사단의 32연대는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동ㆍ남방으로 전진을 계속하여 영등포 우측을 공격, 안양과 수원 사이의 국도를 장악하였습니다. 9월 18일 미 해병대가 김포비행장과 구로를 점령하고 영등포에 육박하자, 김일성은 만일 미군이 영등포역을 점령하면 북한군의 모든 보급이 중단되어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9월 18일 김책 전선 사령관에서 ‘부대를 금강과 소백산까지 후퇴시키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➇ 서울 수복작전 9월 19일 인천에 대규모의 상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해두보 확보를 마친 미 제 10군단은, 미 제 1해병사단에 서울공격을 명령하였습니다. 인천에서 불과 3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수도 서울을 되찾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김포지구의 제5해병연대는 즉시 그곳에서 적절한 도하지점을 선정하여 한강도하를 준비하고, 제 1해병연대는 영등포 이남지역에 대한 작전책임을 미 제7사단에 인계 후 한강 선으로 진출하여 도하준비를 서두르도록 명령하였고, 북한군은 낙동강 전체 전선에서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9월 20일 06:45에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는 계획대로 한강 도하를 개시, 한강 북쪽 대안의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후속 도하한 한국해병 제 2대대는 북쪽 측방 방호를 담당하였습니다. 9월 22일 미 제 1해병대가 영등포 시가를 완전히 장악하여 낙동강 전선으로 보내는 군수물자 보급을 차단시키고, 9월 24일 한강을 도하, 치열한 시가전에 돌입하였습니다. 낙동강의 북한군은 9월 22일까지 버티고 있었으나 군수물자 보급이 차단되자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급기야 9월 23일, 북한군 13개 사단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하여, 북한군 총사령부에서 ‘북한군은 총 퇴각하라’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북한군 5사단 병사들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영등포까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싸울 의욕을 잃었습니다. 9월 24일 08:00에 미 제 7해병연대(한국군 해병 1개 대대 배속)는 서울 북쪽의 북악산 방향으로 우회 공격을 계속하였습니다. 미 제 1해병사단이 서울 외곽으로부터 진격을 계속하고 있을 때, 영등포 남쪽에서 서울 측방에 대한 엄호와 견제임무를 수행 중이던 미 제 7사단의 제 32연대와 한국 제 17보병연대는, 한강을 도하하여 서빙고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9월 25일 미 제 7해병연대가 서울 북쪽 외곽에서, 미 제 5해병연대가 서쪽에서, 그리고 미 제 1해병연대가 남쪽에서 북한군을 포위하여 섬멸하기로 했습니다. 이날 밤 동쪽에서 서빙고를 점령한 미 제 32연대 및 한국 제 17연대가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265고지)을 점령하고 해병대의 공격을 엄호할 수 있게 되자, 한 ․ 미 해병대들은 서대문 및 마포 일대로부터 중심가를 행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습니다. 9월 27일 미 제 1, 5해병연대는 06:00에 각각 맡은 지역을 향해 공격을 개세, 09:30쯤 서대문 사거리에서 서로 연결되어 함께 공격하였습니다. 얼마 후 적의 저항과 바리케이드를 뚫고 1시간이 못 되어 서울중학교와 그 주변의 구릉지대를 확보하였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한 차례 적과 접전한 미 제 5해병연대 제 3대대 예하 G중대는, 전차의 충격력으로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자 단숨에 중앙청으로 진입하여 15:08에 마침내 중앙청을 확보하고 적의 깃발을 끌어내렸습니다. 9월 28일 아침 제 7해병연대 제 2대대는 다시 공격을 개시, 인왕산의 북쪽 능선 일대를 비롯한 최종 목표점을 완전히 확보하였고, 수원 남쪽 오산에서 인천에 상륙한 10군단과 낙동강에서 추격 북상한 미 8군과의 연결이 이루어지자, 북한군의 조직적 저항이 끝나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였습니다. 총격전이 한 차례씩 스쳐 간 거리에는 어느 사이엔가 시민들이 뛰어 나왔습니다. 서울 수복의 소식은 전파를 타고 방방곡곡으로 퍼져 부산 거리에는 특호 활자로 인쇄된 호외가 뿌려지고, 역전 광장에서는 수도 탈환을 축하하는 시민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만세의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서울 거리에는 부모, 형제, 가재(家財)를 잃고 통곡하거나 탄식의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9월 26일 영등포에 임시로 사무소를 마련했던 이기붕 서울시장은 9월 28일 시청으로 자리를 옮겨 구호 및 복수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 이상 인천상륙작전 관련 내용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투사 인천상륙작전」(1983년)을 참고로 정리한 것입니다. ⑨ 인천상륙작전 결과와 그 배후 인천상륙작전 시 아군의 손실은,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동안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미 제 1해병사단이 전사 41명, 부상 2,029명, 실종 6명으로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한국해병대가 전사 97명, 부상 300여 명, 그리고 실종 16명이었고, 미 제 7사단 중의 제 32연대는 전사 66명, 부상 272명, 실종 47명이었습니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 총 손실은 대체로 약 4,000여 명 정도였고, 이에 비해 북한군이 직접적으로 입은 손실은 사살이 14,000여 명, 포로 7,000여 명, 전차 손실 50여 대였습니다. 만약 인천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지 않고 지상으로 반격작전을 수행하였다면 양 군 합쳐 약 10만 명의 피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공률 5천분의 1이라고 모두가 반대했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마쳐지고 서울이 수복되던 당시 국군과 서울 시민,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에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그저 놀라운 감격과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작전이 성공하기까지는, 사람의 지혜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크신 도움의 손길이 함께하였습니다. 큰 위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9월 12일(인천상륙작전 3일 전) 영천을 탈환하였습니다. 국군 8사단 21연대장 김용배 대령이 인민군 15사단의 45연대와 73연대를 5일 동안 끝까지 잘 방어하고, 국군 5연대와 26연대, 10연대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결국 상륙작전 3일 전 9월 12일 빼앗겼던 영천을 탈환하여 한국을 위기에서 지켜냈습니다. 영천을 빼앗기면 곧바로 경주와 오천비행장을 자동으로 내어주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미 전폭기가 뜨지 못하고 군수품도 보급되지 못하여 미군의 작전수행이 불가능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현풍, 영산, 마산, 안강, 포항이 동시에 붕괴되어 부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으므로, 마지막 보루와 같은 곳이 바로 영천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국군이 영천을 탈환하지 못하면 인천상륙에 성공해도 북진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9월 12일 워커로부터 영천 탈환의 소식을 듣고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잃었던 영천을 탈환한 그 즉시 인천상륙작전은 예정된 일정대로 빠짐없이 추진되었습니다. 둘째, 9월 13일(인천상륙작전 2일 전), 김일성은 인천방어 인민군 18사단을 낙동강 전선의 왜관으로 이동 투입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은, 북한 인민군의 모든 전투역랑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인천에 대한 적의 방어 능력이 극히 미약해지거나 적의 증원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이러한 모든 가정이 적중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당시 북한군은 인천의 지형이 상륙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방어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초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해 김일성이 모택동을 만났을 때 모택동이 ‘맥아더의 전략 성향상 필히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구상을 할 것이며, 이를 위해 9월경에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많다. 인천 방어를 튼튼히 하는 것이 좋다.’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모택동의 조언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미군 군함 260척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일본 항구를 떠나 남해 앞바다 물결을 거세게 가르며 한참 통과하고 있을 때, 김일성은 후방쪽 방어를 소홀히 하고 인민군 18사단, 제 9사단 87연대, 독립 849전차연대를 왜관과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한 것입니다. 그는 9월 5일 5차 작전을 명령하면서 낙동강 전선(포항, 안강, 영천, 다부동, 왜관, 현풍, 영산, 마산) 중 어떤 지역이든지 한 곳이라도 돌파구가 생기면 곧바로 포항 및 오천비행장, 그리고 경주와 부산으로 돌진하여 대한민국을 단숨에 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예상과 달리 미 해병과 국군 해병이 월미도에 상륙하였고, 인천에는 미국의 인천상륙 부대를 저지할 인민군 부대가 없게 되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인민군은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달려와 방어했으나 미 해 ․ 공군의 철의 탄막에 막혀 낮에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실로 한국전쟁의 흐름을 한순간에 뒤집어 놓았던 인천상륙작전은, 유엔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역작(力作)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작전이, 그 구상과 계획과 준비와 실행의 모든 과정에서 지휘관 한 사람의 역할과 지도력에 이처럼 결정적으로 의존했던 경우를 근현대 전쟁사 속에서 두 번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당시 우리나라에 미국과 같은 우방이 없었다면, 그리고 맥아더와 같이 지략 있고 대담한 전쟁영웅을 만나지 못했다면 당시 낙동강 전선의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서 우리나라는 북한 인민군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➉ 중앙청의 수얼 수복 기념 환도식 9월 29일 정각 12시,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이 중앙청(中央廳) 내부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환도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시민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날도 서울의 북동쪽 전선에서는 새벽부터 역습하며 공격하는 적과 미 해병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또한 다른 미 해병들은, 이날의 역사적인 행사가 거행될 중앙청 일대와 한강-중앙청 사이의 도로 연변 경비도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홀 중앙의 단상에 나와 선 맥아더 장군은 식 진행을 위한 별도의 사회자 없이 손수 식을 이끌어나갔습니다. “대통령 각하,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인간 규범에 합당한, 위대한 희망과 영감(靈感)을 안고 싸운 우리 유엔군 부대들은 마침내 이 유서 깊은 한국의 수도를 해방시켰습니다.” 수도 서울의 기능과 권한을 한국 정부에 돌려준다는 요지를 담은 맥아더 장군의 연설은 간결하면서도 감격적이었습니다. 순간의 고요가 흐른 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맥아더 장군이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하자, 좌중의 인사들도 모두가 맥아더 장군과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감동이 남달랐던 이승만 대통령은 단상에 나와 한동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습니다.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과 다른 제복의 참석자들을 둘러보면서 UN군의 노고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명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⑪ 각 전선에서의 역전과 북으로 진격 한편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경북 영천과 신녕에서 국군 8사단과 6사단이, 경북 칠곡의 다부동에서는 국군 1사단이 반격하는 등, 한국전은 모든 전선에서 역전하여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국군 3사단은 9월 23일 동해안 홍해 북쪽을 탈환하였고, 9월 24일 강구에 도착, 9월 26일 평해 탈환, 9월 27일 울진, 9월 28일 삼척, 9월 30일 오후 8시 국군 3사단 23연대는 주문진 38선까지 진격하였습니다. 10월 1일 38선을 넘어 양양 앞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15일 만에 포항에서 38선까지 도착하였습니다. 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사악 지대의 38도선을 넘었고(약 3만 명 추정), 미처 38도선을 넘지 못한 대다수의 북한군 패잔병은 지뢰산, 태백산 일대로 잠입하여 게릴라(일명 빨치산)로 남아 1951년 초 백선엽이 이끄는 부대의 의해 진압될 때까지 비정규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⑫ 후퇴하는 인민군들의 양민 학살과 납치 만행 서울 유지가 곤란하다고 생각한 북한 공산당은 이북으로 후퇴하기 전 남한 내의 반공투사를 숙청하고(약 20,500명 사상자), 약 83,000명의 유능한 인재(선생, 기술자, 예술인 등)들을 강제로 끌고 갔으며, 시설, 물자 등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서울을 초토화하였습니다. 북으로 올라갈 때는 북측이 특정 인물을 지목해서 의도적으로 납치하여 갔습니다. 대한민국 통계연감 자료에 의하면, 9 ․ 28서울 수복 당시 강제로 납치한 양민이 약 83,000명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북한으로 넘어가려면 미아리 고개를(현재 서울 미아리) 넘어야 했습니다. 그때 미아리 고개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을 당하고, 서울 사수를 위한 치열한 전투로 수많은 국군이 희생당했습니다. 특히 9 ․ 28서울 수복 당시에는 가족들끼리 생이별하는 한 많은 장소가 되었는데, 그때의 처절한 시대 상황을 담아 노래한 것이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입니다. 1절)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대사]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때 그날 나는 당신이 떠나시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어린 것을 등에 업고 폐허가 된 거리를 헤매이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어린 것의 두 뺨을 적시곤 했답니다. 여보! 우리는 왜 한 핏줄이요 한 형제이거늘 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증오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젊은 날들은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채 이젠 백발이 되었어요. 여보! 제발 백발이 되었더래도 좋으니 꼭 살아만 계세요. 머지 않아 우리 민족이 서로 만나 한 자리에 모이는 날 우리는 서로를 얼싸 안고 마음껏 자유를 외치면서 다시는 이 땅 위에 우리와 같은 비극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빌겠어요. 여보! 2절)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구구 절절 전쟁으로 인한 처절한 아픔과 통곡이 서려 있습니다. 미아리 고개가 아니라 창자가 끊어질 듯 심한 슬픔과 괴로움으로 탄식하는 피눈물의 고개였습니다. 가사 그대로 이별 고개요, 한 많은 고개였습니다. 납북자 중 남자가 98.2%, 연령대는 85%가 10대 후반부터 35세 사이인 것을 볼 때 ‘남편과 아내의 생이별’ 혹은 ‘부모와 자식 간의 생이별’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짐작하게 됩니다. 화약 연기 속에 미아리 고개를 넘으면서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라는 대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목에 있는 ‘단장(斷腸)’이라는 말만 보아도, 비참했던 전쟁으로 인한 생이별의 비통함이 창자가 다 끊어지도록 너무도 고통스럽고 너무도 서러웠음을 애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가수이자 작사가인 반야월 씨가 피난길에서 돌아와 쓴 곡이라고 합니다. 반야월 씨는 6 ․ 25전쟁의 북새통에 헤어졌던 아내와 9 ․ 28서울 수복 때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4살짜리 딸 수라는 오랜 굶주림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다 애처롭게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전쟁 통에 죽 한 그릇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비명에 간 딸, 수라의 마지막 모습을 애써 그려보며 비통한 마음을 함께 담은 것입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들을 때마다, 6 ․ 25라는 전쟁의 비극 속에 우리 아들과 딸, 부모, 부부, 형제와의 생이별의 아픔이 느껴져 숙연해집니다. 당시 이북으로 끌려간 ‘전시 납북자들은’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공식적으로 송환된 적이 없습니다. 살아 돌아오기만을 밤마다 눈물짓고 어린 자식과 함께 기다린 아내와 부모의 애달픈 마음은 아랑곳없이 영영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 38선 넘어 북진(10월 1일), 압록강 초산 도착(10월 26일) 국군 수도사관과 북한군 12사단이 경북 경주 안강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를 얻고 진격하여, 9월 30일 국군 수도사관 18연대가 38선 서림리(강원도 양양군 서면)에 도착하였습니다. 국군 3사단 23연대는 주문진 38선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이때 장병들은 38선을 넘자고 아우성이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38선을 넘어 북진하라고 명령하여 마침내 1950년 10월 1일, 국군 3사단 23연대 3대대장 허정순 소령은 38선을 넘어 양양 앞 고지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래서 10월 1일은 남침한 북한을 국군이 반격한 끝에 38선을 돌파한 날로서, 우리나라 ‘국군의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1950년 10월 30일, 평양 시가지에 남아 있던 적군의 소탕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북한군이 평양을 후퇴하던 10월 18일 밤, 그들은 평양형무소에서 조만식 등 수감 중이던 반공인사 500여 명을 총살하고 도주하였습니다. 이중 조만식 등 일부 시체는 대동강변에 웅덩이를 파 가매장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해둔 채 후퇴하였습니다. 38선을 돌파한 국군은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하고 1950년 10월 30일, 평양 시가지에 남아 있던 적군의 소탕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 시청 앞에 도착하여 평양 시민 35만 중 10만여 명이 모여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평양 시민 여러분, 공산 치하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제 남과 북의 동포가 함께 자유스럽게 살아갑시다. 이제 한 동포가 되었으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 뭉칩시다.” 이승만의 연설을 듣고 그들은 정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환영을 했습니다. 이때 공상당원 60만 명 중 45만 명이 당원증을 버리고 자수하여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려 하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이렇게 해서 국군이 완전히 북한을 점령하여 통일시켜 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때 모였던 평양 시민들은 대부분 이듬해 1 ․ 4후퇴 때 파괴된 대동강교를 넘어서 남쪽으로 월남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전 부대에 대하여 일제히 북으로의 진격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산 지역으로 상륙한 미 제 10군단과 서부 전선의 미 제 8군이 북으로 올라갈수록 양부대간의 간격은 50마일(약 80.5km) 이상으로 벌어졌고 이리하여 통신연락이 곤란해지고 협조가 어려워졌습니다. 만약 북한군이 이 간격을 통하여 공격해 온다면 유엔군은 후방이 위헙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인 불리함과 위험을 안고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을 향한 전진을 계속하였습니다. 국군 제 2군단 예하 제 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군단 명령을 수령한 후 제 7연대를 우 , 제 2연대를 좌, 제 19연대를 예비로 하여, 초산-벽동 간의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제 7연대는 초산을, 제 2연대는 온정리를 경유하여 벽동을 탈환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국군 제 6사단 제 7연대는 10월 26일 고장을 출발하여 초산으로 향하던 중 초산천 연변에서 저항하던 북한군 연대 규모의 혼성병력을 두 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격퇴시킨 후 초산으로 돌입하였습니다. 오후 2시 15분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한만 국경선에 도달한 최선봉 부대가 되었습니다. 이는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 만의 일입니다.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초산을 점령한 후 압록강 신도장(新島場)에서 태극기를 꽂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수통 두 개를 압록강 물에 담아,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나는 육본에 선물로 보내기 위해 사병에게 보관시켰습니다. (11)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1950년 10월 25일 이후) 북 ․ 중 상호 방위협정은 1949년 3월 18일 소련의 중재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공동방위에 대한 공동행동을 약속하고 만주에서 병력과 무기를 북한에 제공하며, 북한은 만주에 있는 일본인 기술자 및 고용원, 그리고 일본군수품을 중국이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양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중공군 소속 한인부대 약 2만-2만 5천 명을 북한에 출병시키기로 했다는 점과 북 ․ 중 공동방위 약속은 타국이 북한을 공격해 왔을 때 중국이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입니다. 김일성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중국군이 참전하겠다는 점을 사전에 미리 약속을 받아 놓았던 것입니다. 이 대목 역시 북한이 사전에 6 ․ 25를 철저하게 준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방위협정대로 마침내 중공군이 전쟁을 개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월 24일, 15연대장 조재미 대령이 중공군 포로 1명을 잡았는데, 직접 심문한 결과 중국 남부에 주둔하던 부대가 한반도에 진입했으며, 산중에 이미 수만 명의 중공군이 들어와 숨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중공군이 미군 공중 정찰기에 잡히지 않은 것은 그들이 험준한 산맥의 곳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군은 중공군이 서부 전선의 국군 3개 사단(1, 6, 8사단)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깊은 산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실도 모른 채, 압록강 초산에 도착한 감격에 젖어 있었습니다. ➀ 중공군의 첫 나팔소리와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10월 25일 밤) 10월 25일 밤, 서부전선의 국군 제 1사단이 막 수복한 운산(雲山)에서 중공군의 첫 나팔소리와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50-60만 명으로 추산되는 중공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물밀듯이 내려와 크게 위협을 주고 사기를 떨어트려 유엔군의 북진은 좌절될 수박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은 산악지대를 뒤덮고 정면으로 쳐들어왔는데, 쓰러트리면 또 밀려오고 계속 밀고 내려와 그 전투는 전쟁이라기보다는 마치 울창한 삼림에서 벌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10월 27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39군을 운산 북쪽에 배치하여 국군 1사단의 북진을 막게 하고, 66군으로 미 24사단과 영 27여단의 북진을 저지하게 하였습니다. 희천, 고장, 초산의 길은 첩첩산중이며 도로가 좁고 고개가 많고 꼬불꼬불한데다 눈이 와서 육로로는 도저히 군수품을 운반할 수 없었고, 항공으로 공수하려 했으나 날씨 관계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6사단 2연대는 25일부터 온정리 부근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26일에는 포위되어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를 돕기 위해 19연대가 증원 차 진격하였는데 이들마저도 중공군에 거의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➁ 7연대(임부택 연대장) 중공군에 참패 송석하 부사단장은 포위 섬멸될 가능성이 있는 7연대를 빠른 시간 내에 희천까지 철수시키는 일이 급하였습니다. 10월 29일, 7연대는 군수품 보급이 지연되어 고장에 그대로 있었고, 2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온정에서 태평으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19연대는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어 증원이 저지당하고 있었습니다.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첩첩산중 고장에서 보급이 끊겨 오도가도 못하는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중공군이 풍장 남쪽 10km까지 내려와 7연대를 포위하고 있었는데도 임부택 연대장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10월 30일 오전 7시, 임부택 연대장은 항공지원을 받으며 2대대를 앞세우고 3대대, 연대본부, 1대대가 후미가 되어 100대의 차량으로 고장을 출발하여 풍장으로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남하한 지 한 시간이 지난 오전 8시, “귀 연대는 위험한 상태에 빠졌으므로 최선을 다하여 철수에 성공하기 바람.”이라는 송석하 부사단장의 무전을 받았습니다. 국군 중에 최강인 6사단 7연대가 위기에 몰린 것입니다. 2대대가 선두부대가 되어 7연대의 긴 행군대열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로를 메웠을 때, 중공군은 양쪽 산에 매복하였다가 2대대를(대대장 김종수 중령) 기습하여 중간 중간 토막을 내면서 맹타를 가하였고, 국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7연대는 송석하 부사단장의 전보 명령에 따라 그 많은 차량과 중포를 포기하고 오후 8시 첩첩산중 풍장을 출발하여 창동 부근에 이르렀으나 다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 위기에 놓였습니다. 10월 30일, 밤 12시가 지나자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를 불어 신호를 하고 북과 꽹과리를 쳐서 국군의 넋을 빼놓아 질겁하지 않은 장병이 없었습니다. 중공군은 밤 시간만을 이용해 교모하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자극하면서 공격해 왔습니다. 결국 6사단 7연대 장병들은 3,552명 중 878명만 남고 2,674명이 희생되었으며 국군은 참패를 당하여 12명의 중대장 중 6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➂ 미 제 1기병사단 8연대 국군 1사단 중공군에 참패 10월 31일 오전 6시, 12연대, 15연대, 11연대 등 1사단은 미 기병사단 8연대와 함께 계속 전진하였습니다. 중공군 39군은 미 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미 공군과 포병대가 관측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놓았습니다. 국군 1사단의 진격이 부진하자 워커는 미 제 1기병사단을 투입시켜 압록강까지 진격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개선할 준비에 들떠 있다가 갑자기 출동명령을 받은 미 제 1기병사단 장병들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운산 북쪽은 첩첩산중으로 좁고 꼬불꼬불한 도로여서 중공군이 공격하기에는 아주 좋았으나 국군이 진격하기에는 매우 힘든 곳이었습니다. 전차나 차량이 고장 나면 전진과 후퇴를 못하는 좁은 도로였고 도로 양쪽은 가파른 산이어서 진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지형이었습니다. 10월 말 당시 북한의 운산 근방의 산악 지역은 몹시도 추웠습니다. 더구나 장병들은 낙동강에서 운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걸어와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이나 인천에서의 보급로가 너무 길어져 수송도 원활하지 못하여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천하무적이라고 하는 미 기병사단 8연대도 중공군에 참패를 당하였고, 국군 2사단 역시 15,8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날 하루에 미 8연대는 350여 명이 전사, 250여 명이 부상 총 6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3대대장 올몬드 소령이 전사하였고, 증원차 왔던 5연대도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으며 연대장 존슨 중령이 전사하였습니다. 전차와 항공기로 무장한 세계 최강부대가 소총부대에 의해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국군 1사단은 530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되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군과 미군, 유엔군이 이토록 험준한 곳,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 바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고 수많은 목숨들이 숨져간 이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우리 후손들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➃ 맥아더 장군의 총 진격 명령(1950년 11월 24일) 중공군은 1차 공세 후에 식량과 탄약이 떨어져 11월 6일부터 11월 24일까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미 제 1기병사단 8연대와 수많은 병사들이 중공군에게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죽었는데도 워커 장군의 우려를 한마디로 묵살하고, 11월 24일 종전 총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맥아더는 유엔 장병들에게 “승리는 눈앞에 있으며 여러분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확신한다.”라고 하여 곧 전쟁이 끝날 것처럼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전 병사들은 싸울 의지는 적었지만 집으로 갈 생각으로 흥분하여 전진하였습니다. 마침 11월 24일은 추수감사절이어서 뜨끈뜨끈한 칠면조 고기로 점심을 먹고 병사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이는 20만으로 무장한 중공군의 대대적인 2차 공세 하루 전이었습니다. 마침내 11월 25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가 38, 39, 40, 42, 50, 66 합 6개 군, 18개 사단으로 대대적인 2차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포위를 끝내고 호 속에서 나뭇잎과 담요 등으로 추위를 이기며 국군과 미군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는 20군, 26군, 27군 등 3개 군 9개 사단이 장진호를 중심으로 미 해병사단과 7사단을 포위하기 위해 이동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선천에서부터 희천, 덕천까지 중공군이 포진하여 자루 형태를 만들어 놓고 국군과 미군이 자루 속에 들어오면 덕천의 38군이 자루 속에 들어가 있는 국군과 미군을 자루 입구를 꽉 막아 놓고 두들겨 팰 작전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것을 모르고 죽음의 자루 속을 향해 종전 진격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➄ 영원에서 국군 8사단 중공군에게 참패(1950년 11월 26일) 11월 25일, 8사단이 첩첩산중으로 진격을 계속하는데 적이 계속 증강되고 저항이 점점 거세지자 8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심상치 않아 각 연대에 “전진을 중단하고 현 전선에서 진지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방어에 전념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1월 26일 새벽 4시, 중공군은 국군 7사단을 급습하였고, 8사단 후방을 순식간에 포위해 버렸습니다. 8사단 21연대와 중공군은 날이 샐 때까지 그칠 줄 모르고 싸웠고, 10연대도 새벽 2시부터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으며 새벽 4시에는 더 치열해졌습니다. 중공군은 살금살금 기어와 부대 간의 연결 전화선을 절단하였습니다. 후에 이성가 8사단장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군 법정에 섰습니다. 판사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할 대 이성가 사단장도 어떻게 2일 만에 사단이 붕괴되었는지 알 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8사단이 이토록 참패한 이유를, 40년이 지난 후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쓴 「항미원조 전쟁 회억(回憶)」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➅ 덕천에서 국군 7사단 중공군에게 참패(1950년 11월 25일) 중공군은 이른 아침부터 국군 7사단을 공격하였고, 국군 6사단이 가담하였지만, 중공군이 7사단 사령부가 있던 덕천까지 밀고 내려와 근방에 있던 국군 8사단까지 자동 포위당했습니다. 중공군 11월 25일 오전 10시, 덕천에서 지휘계통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제 6, 7, 8사단 패잔병들을 포위, 공격하여 참패시켰습니다. 이때 10연대장 고근홍 연대장이 포로가 되었고, 5연대장 박승일 대령은 장병들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추운 겨울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허기진 가운데 산 속에서 잠을 자면서 아호비령 산맥을 따라 도망치는데 다시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5연대장 박승일 대령과 장병들은 모두 손을 들어 항복하였습니다. 덕천에서만 국군 3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루에 한 끼의 식사를 하는데 그것도 강냉이 100알 정도였습니다. 무장 해제된 채로 3,000명이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온정에 도착하니 국군 2군단 포로가 10,00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➆ 공격 6일 만에 총 후퇴 명령(1950년 11월 29일) 12월 4일 평양, 12월 15일 38선 이남으로 철수 맥아더 장군은 “현 정세는 전혀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전쟁을 한다는 기초적인 백지상태로 돌아가 판단할 필요가 있다.”라고 합참본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이후로 계속해서 중공군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육박전으로 공격해오자, 공격 6일 만인 11월 29일 맥아더 후퇴 명령으로 12월 3일 미군은 청천강 교두보를 포기하였으며, 12월 4일 평양, 12월 15일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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