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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5)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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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흥남 철수 작전(19501212-24)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해상 철수 작전입니다. 중국의 예기치 못한 참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수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때는 영하 30도가 넘는 엄동설한이었습니다. 철수 작전은 1215일 미 해병 제 1사단, 1217일 국군 수도사단, 1221일 미 제 7사단, 1224일 미 제 3사단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피난민 3천 명만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했으나 김백일 장군을 비롯한 참모들이 피난민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데리고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군용 선박과 민간 목선을 최대한으로 활용, 10군단 전체 병력 105천 명과 북한 피난민 98,000여 명(일부 기록에는 91,000)이 철수했습니다.

 

1224일 오후 245, 마지막 수송선이 부두를 떠날 때 남은 피난민들은 울부짖으며 가는 배를 향해 몸부림쳤고,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배에 탄 사람과 거의 같은 수의 피난민이 선박 부족으로 그대로 뒤에 남겨져야 했습니다. 이들은 흥남항이 폭파될 때 목숨을 잃거나 대부분 중공군에게 잡혀 모두 학살당했습니다. 또 기적적으로 배를 타기는 하였으나 인원수가 너무 많아 움직일 수가 없고, 바닷바람을 막을 장치가 없어 배 위에서 얼어 죽는 자가 많았습니다. 목선을 빌어 탄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얼마 가지 못하고 그대로 가라앉기도 했습니다. 당시 흥남에서 14천 명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항해한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는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희생자는 한 명도 없었고, 오히려 그곳에서 모두 다섯 명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국방홍보원(www.dema.mil.kr)에서 제작한 60년 전 사선에서(6 25전쟁 실록 다큐멘터리, 2010) 동영상에서 증언자로 나온 참전용사들의 증언에는 당시의 처참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보통 인원이 얼마나 타나면 말이지 2-300명밖에 못 타요. 그런데 흥남 철수할 때 말이죠. 거기에 몇 명 탄 줄 아십니까? 만 명 가까이 탔습니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움직일 틈이 없다고...”

- 최영섭(당시 해군소위. 1928년생)

춥기는 엄청 추워 가지고 그때 영하 30, 28도 그렇게 오르내리는 기온이었어요. 파도 물결이 쳐도 어는 그런 정도였으니까. 울부짖으면서 모두 배에 오르다가 힘이 없어가지고 물에 떨어지는 사람 철수하려니까 LST같으면 앞에 문이 열리는 거 아닙니까? 이게 서서히 철문이 닫히는데 철문에 끼는 사람들... 거 참 이루 볼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죠. 그렇게 해서 흥남 철수 작전은 끝난 겁니다.”

- 한영섭(당시 종군기자. 1928년생)

 

당시 북한 주민들이 왜 이토록 유엔군을 따라 남으로 피난을 가고자 했는지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북한 주민의 흥남 철수의 그 비참상은 말로 글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정없이 마구 퍼붓는 폭설이 무릎까지 쌓여 발을 떼어 놓기에도 힘이 듭니다.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어린아이까지 잡아끌어야 하는 피난길은 너무도 먼데다가 굶주림까지 겹쳐 몰려옵니다. 가는 곳마다 부모 잃은 어린이가 헤매고 있고 가깝게 들려오는 포성이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이런 일을 피부로 겪은 세대들은 몸서리치던 그때의 참상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흥남부두의 이별을 노래한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전쟁 대문에 가족, 연인과 생이별을 하고 피난지에서 장사치로 일하면서,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실향민의 기원과 그들의 아픔을 토로한 절절한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1950.11.27-12.11), 중공군이 7개 사단 규모로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빠져나오기 위해 2주일 동안에 치른 철수 작전으로, 세계 전사상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철수 차례로 꼽히며 미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습니다. 11월 말, 살을 에는 혹한 속에 40km가 넘는 협곡지대에 겹겹이 에워싸인 여러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적의 탄환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엔 공군이 지원해 준 돌파작전 전개로 철수는 무사히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미군 약 7,200명이 희생되고(사망 3,637, 부상 3,657) 중공군은 미군의 10배 이상이 사망했습니다(부상 12,500, 사망 25,000).

 

(13) 19513, 38선 회복

30만 명이 넘는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195114일 다시 수도 서울을 빼앗겼으나(1 4후퇴), 중공군도 18일을 기점으로 수원-여주-강릉을 잇는 선에서 그 동안의 손실 때문에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중공군 공세의 한계점을 간파한 국군과 유엔군은 신임 제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명령 하에 1951125일을 기하여, 썬더볼트(Thunderbolt: 벼락)라고 명명된 미 제 1, 9군단의 반격을 일제히 시작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한강 남안-횡성 선에 이르렀을 때 다시 중공군의 원주 일대에서 한 차례의 공방전을 벌였으나 이를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하였습니다.

1951212일 중공군 39군 소속 115사단, 116사단, 117사단의 3만여 명이 지평리의 미 2사단 소속 23연대를 포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23연대장과 미군은, 방어 준비를 철저히 하여 밤새도록 전투하였으며 결국 중공군은 수만 명의 시체를 남기고 철수하였습니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중공군이 숫자만 많았지 전력은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국군과 연합군은 반격을 하여 중공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었습니다.

315, 드디어 1 4후퇴 이후 70일 만에 서울을 되찾았으며,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습니다. 중공군은 19514-5월 참전 이후 최대 규모의 인원을 동원하여 제 5차 대공세를 펼쳤으나, 참패를 당해 대규모의 인명 손실을 입었습니다. 1951526일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중공군 5개 군(6만 명)을 완전 궤멸시켰으며,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29,156명이 죽고, 3,252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전선은 교착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4) 휴전 협정(1953712-27)

이후 한국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으며, 유엔군과 북한군은 서로 유리한 위치에서 휴전을 맺기 위해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6 25전쟁 중 3분의 2는 휴전 회담을 병행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지속하였습니다. 19515월부터 휴전회담제의와 결렬을 반복하였고, 38선 부근에서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8-9월 사이의 피의 능선 전투195210월 백마고지 전투가 유명합니다.

 

피의 능선 전투에서 국군은 1개 연대 병력에 해당하는 2,772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미군 2사단은 1,700, 북한군은 15,000명의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195210월 초 휴전 회담에서 포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대표적 고지 쟁탈전으로, 106일부터 15일까지 중공군의 피해는 확인된 사살자 8,234, 추정 사살자 6,098, 포로 78명이었고, 국군 사상자는 3,416명이었습니다.

31개월 2일간 지속된 수많은 전투 내용을 일일이 다루지 못하고 주요 전투 중 일부 내용만을 발췌하여 요약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195335일 스탈린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마침내 전쟁 발발 만 31개월 2일 만인 1953727일 밤 10,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대략 2년을 끌어온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국제연합군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대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팽덕회가 협정 문서에 각각 서명함으로써, 그 시간 이후 현 전선에서 모든 무력행위를 중지하는 휴전선(休戰線)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정전회담 본회의장 안에서는 양측 대표들이 군사분계선을 그었습니다.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동서로 그은 선을 북방한계선(NLL),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동서로 그은 선을 남방한계선(SLL)이라고 합니다. 이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4km를 비무장비지대(DMZ)라 하여 남북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가끔 비춰주는 전방(前方)의 철책이 바로 남방한계선입니다. 4km로 정해진 이유는 그 당시 포사거리를 벗어난 거리였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그 거리가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휴전협정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1951623

소련 유엔 대표인 말리크 외상이 평화의 대가라는 연설을 통해 휴전회담 개회 의사 표명.

630

매슈 리지웨이 장군, 라디오 방송을 통해 회담 제안.

중공군도 회담 개최 의사를 밝힘

78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 연락장교 회담 개최.

710

개성에서 본회담을 시작. 휴전선 설정에 대한 양측 주

장이 대립하며 합의 실패.

726

적대행위 중지와 비무장지대 설정을 위한 군사경계선

협정, 정전 및 휴전 위한 세부 항목 협정, 포로 교환에

관한 조치, 한반도 정치적 해결을 위한 남북간 정주에

대한 권고사항 등 4개항 의사 일정 합의.

1127

휴선선과 남북 간 2km 폭의 비무장지대 설정 합의.

1210

포로교환 문제로 회담 정체(유엔군은 자유송환 원칙,

공산 측은 강제송환 원칙을 주장).

195257

거제도 포로수용소 소장인 도드 준장이 수용소 내에서 피랍.

195335

스탈린 사망 후 휴전회담 진척, 쌍방 연락장교회담에서 병상 포로 교환에 합의(420, 유엔군은 6,670명을 공산측에 인계하고, 유엔군 684명을 송환).

618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포로수용소를 개방, 25천 명의 반공 포로 석방.

625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로버트슨 국무차관

보를 서울에 특사로 파견.

711

이승만 대통령, 로버트슨 회담 후 협상이 급진전.

727

휴전협정 성립, 비무장지대 설치

 

(15) 전쟁 피해 집계

피해 규모

1950625일 일요일 새벽 4, 남한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날과 시간에 그야말로 기습을 당했습니다. ‘기습(奇襲)’의 사전적인 뜻은 첫째는 몰래 갑자기 습격함”, 둘째는 남이 알아차리기 전에 갑자기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습은 적이 알기 전에 갑자기 저을 덮쳐서 공격하는 것이고, 또한 적이 알았더라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6 25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북한의 일방적인 공격이었기에 남한 입장에서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데다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기습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6 25동란의 피해 규모도 대단했습니다.

 

6 25동란은 1953727일 밤 10시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만 31개월 2일 동안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냈습니다. 6 25동란은, 세계사에서 1,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세 번째로 비참한 전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3년 내의 사망자 수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 수치입니다.

 

 

6 25전쟁 피해 규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사망

부상

실종 및 포로

한국군

137,899

450,742

32,838

유엔군

40,670

(미군: 36,940)

104,280

(미군: 92,134)

9,931

(미군: 8,176)

북한군

520,000(부상자 포함)

120,000

중공군

148,600

798,400

25,600

민간인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북한

244,663

128,936

229,625

84,532

303,212

1,500,000

피난민(320), 전쟁미망인(30만 여명), 전쟁고아(10만 여명)

 

 

전쟁포로의 송환 빛 반공 포로 석방

6 25전쟁 중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수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이들 포로들은 휴전을 전후로 4회에 걸쳐 처리되었습니다. 쌍방간의 포로는 공산군 포로가 132,027명이었고, 유엔군 포로는 13,816명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에는 최대 17만여 명에 이르는 공산군 포로들이 거제도 등지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 중 7만 명이 넘는 반공포로들이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측은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인도주의적 송환 원칙을 주장하는 반면, 공산군 측은 전원을 무조건 강제 송환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한국은 당시에 유엔군 측이 관리하고 있던 공산군 포로들 중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던 반공초로 34,900명 중 26,930명을 이승만 대통령 독단으로 618일 자정을 기하여 일제히 석방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주었고, 미국으로부터 휴전 후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원조를 얻어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네 차례의 포로처리 중 반공포로의 석방은 6 25전쟁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5. 북한 사회의 실상

 

6 25전쟁에서 북한의 적화통일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틈만 나면 6 25와 같은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6 25 후부터 오늘날까지 북한 사회의 실상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은 철저한 폐쇄사회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습니다. 각 지방 보안서에서 통행증을 받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으며 그곳에 가서도 배급표가 없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국민들 가운데 북한을 찬양하고 체제를 옹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북한에 자유가 없다는 확실한 증거는 탈북자들을 무조건 총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여권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원하는 지방이나 해외로 나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난다고 막을 사람이 없으며 죽이거나 형무소에 보내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한 체제는 철저하게 지방이나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이동을 막자 북한과 중국 국경선을 통해 북한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만주 지역에는 탈북자가 약 30만 명, 남한에는 2만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탈북자들이 발각되면 즉시 총살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후계자로 김정은이 부각될 때부터 탈북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탈북자를 무조건 총살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한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이 아버지에게서 내치(內治)를 넘겨 받으면서 탈북을 무조건 근절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김정은이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국경봉쇄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북한은 탈북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몇 가지 조처를 단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국경으로 가는 길목마다 단속하는 초소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설사 한 초소를 돈으로 매수하였다고 할지라도 다른 초소에서 적발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북한과 중국 국경 경비대를 남한과 북한의 국경 경비를 하는 부대와 같은 등급으로 대우하고, 출신 성분과 신체 조건이 좋은 최정예부대를 선택하여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탈북자에 대한 사살권을 부여하였으며 탈북자를 사살한 군인에게는 표창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과 중국 국경에 철조망을 치고 있습니다. 북한은 철조망을 칠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중국 국경선에 철조망을 건설함으로 북한의 탈북 봉쇄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미 허릉, 싼허, 투먼 등 주요 탈북 통로에 철조망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20111월부터 11월 사이에 현재 해상을 통하여 탈북한 경우가 6차례나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상탈북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북한과 중국 북경선 통제를 강화하면서 육상탈북이 어려워지자 북한 주민들이 해상을 통해 탈북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북한은 사실상 거대한 철조망으로 꽁꽁 가두어 놓은 사회가 되었으며, 나라 전체가 감옥인 수용소 국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위 내용은 2011117일 동아일보 기사를 주로 참조하였습니다.

 

(2)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 70조에 보면 모든 공민은 희망과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며 안정된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보장받는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헌법에는 명백하게 직업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북한에서의 직업 선택은 본인의 의사 보다는 당과 행정기관의 조정, 통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민들의 직장 배치는 각 부문별 수요에 따라 중앙의 총체적인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판단 기준은 성분과 당성이라는 이른바 정치적 기준입니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의 당원이 아니면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학급 반장도 당원의 자녀라야 합니다. 북한에서 당원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당원이 되면 당증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며, 당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든지 분실할 경우 심한 비판을 받고 그 직에서 해임됩니다. 또한 당증 검사 시 당증 속의 김일성 초상화가 훼손되어 있으면 이때도 심한 비판을 당하고 직장에서 해임됩니다. 그래서 당증을 몇 겹의 비닐로 싸서 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기준 외에도 학력은 신분 상승의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핵심계층(혁명가 가족, 영예군인,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접견한 사람, 영웅, 공로자 등)을 제외한 일반 주민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엄격한 통제를 받기 때문에, 이들이 사회적으로 지위나 보수가 높은 직업으로 이동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3)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북한의 식량난은 심각합니다. 본래 북한은 배급제를 통해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제난으로 식량 배급이 끊어지고 주민들은 굶주림 속에서 많은 사람이 아사(餓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계식량계획(WFP)은 현재 북한의 식량은 수요보다 약 25%가량(100만톤 이상)이 부족하다고 보고, 북한을 만성적 식량난을 겪는 국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은 약 130만톤의 식량이 부족하고, 650만 명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식량이 부족한 이유는 북한의 자연 환경에도 영향이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과도한 국방비 지출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은 119만 명이라는 세계 4위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방사포는 5,100문으로 세계 1위이고 이것은 4,000문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보다 많은 것입니다. 또한 전투기 875, 잠수함 70, 전투함정 420여 척, 전투기 820여 대, 그리고 약 2,500-5,000톤의 다양한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지상군 전력의 70%, 공군 전력의 40%를 평양-원산 이남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대한민국, 특히 수도권에 대한 기습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공기부양정 등 260여척의 상륙함정과 AN-2 등 침투용 항공기 330여 대, 그리고 2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특수전부대가 있습니다. 북한은 언제든지 대한민국을 침투하여 후방과 전방을 점령하려는 준비를 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이 같은 전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국가 자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는데, 보통 핵융합을 성공하려면 약 8조원의 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도 알지 모하고 좌파들은 북한은 먹을 것이 없어서 남한을 공격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방심시키고 있습니다. 북한이 먹을 것이 없는 이유는 과도한 국방비 지출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식량이 130만 톤이 부족한데, 미국에서 옥수수 200만 톤을 수입하는 데는 약 3000억 원이면 된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지금 북한은 3개월간 쓸 수 있는 기름 150만 톤, 식량 100만톤 탄약, 170만 톤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경제력보다는 군사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북한이 50여 년전부터 강조했던 바입니다. 196212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바에 의하면, 인민경제 발전에 일부 제약을 받더라도 우선 군사력을 강화하여야 한다.”라고 하였고, 당시 북한이 발표한 4대 군사노선은 전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 전군 현대화 전군 간부화였습니다. 이러한 취지는 1998년 김정일의 선군정치 대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경제건설보다 중요하나 것은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며 총대가 강하면 나라가 강할 수 있다.”(19981919일 노동신문)

2010410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여전히 경제보다는 군대가 강화되어야 한다고 줄곧 외쳤습니다. 인민군대의 전투력 강화와 국방공업발전을 위한 물질적 보상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이처럼 군사력 증강을 계속하고 있는 한, 북한의 경제난은 극도로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북한이 경제가 어려워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북한을 얕보고 북한의 실체를 너무나 모르는 자들입니다. 북한은 국가적 자본을 군사력 증강에 대폭 지원하고 있는 경제 구조 때문에, 주민은 극도로 가난할 수밖에 없으나 군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큰 부자요 대군(大軍)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북한 주민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는 면만을 보고 북한의 군사력을 경시하는 풍조에 휘말려 안보의식이 혼탁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국가의 재원을 김정일과 공산당 일당 독재를 위하여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현재 300만 명이 굶어 죽고 심지어 사람의 시체를 먹는다는 소문이 날 정도인데, 김일성 시신을 영구 보존하기 위하여 금수산 기념 궁전을 지으며 무려 8억 불을 허비했습니다. 또한 김정일의 별장은 33개이며 이 별장을 수리하는 데 2008년도에만 434억을 사용하였다고 하니 북한의 비인도적인 정치는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2011년 대북 인권단체 좋은 벗들의 이사장인 법륜 스님이 55일 워싱턴 D.C. 소재 미국평화연구소(USIP)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 “북한에서는 최근 심각한 식량난으로 여성들의 낙태와 성매매가 급증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성매매를 하는 사례가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늘어나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식량을 구하려고 가구를 팔다가 집까지 팔아넘기는가 하면 이혼율이 높아지는 등 가족해체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201010월에 방영된 KBS 스페셜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토끼풀을 뜯어 먹는 깡마른 여성이 소개되었는데 이 여성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1020일경 옥수수 밭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역대 정부에서 행하였던 대북 지원 금액을 살펴보면, 김영삼 정부가 2,266억원, 김대중 정부가 27,028억원, 노무현 정부가 56,777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자료: 한나라당 진영 의원실). 그리고 남한 국민 200만 명이 1인당 20만원 씩 북한에 돈을 주고 금강산 관광을, 개성관광은 9만 명이 1인당 10만원을 주고 다녀왔습니다. 또한 200년에서 2008년까지 지방자치단체에서 683억 원을 북한에 지원해 주었고, 이중 제주도가 지방자치단체 중 제일 많은 185억 원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2005년부터 북한의 IT요원 교육을 위해 남한 통일부의 사회 문화교류지원 기금에서 43,200만원, 우리민족 서로 돕기 운동본부에서 34,900만 원, 하나비즈닷컴에서 8,300만 원, 이명박 정부에서 6,300만 원을 지원해 주었는데 이 자금은 오히려 북한의 해킹부대를 양산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200977일 일 한미 26개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디도스 공격을 하였으며, 육군 3군 사령부를 비롯한 각 부대 심지어는 농협의 전산망까지 공격하여 엄청난 손실을 끼쳤습니다. 북한은 이 막대한 경제 지원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었어야 하는데, 김정일은 그 돈으로 남한을 침략하는 미사일과 핵을 개발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북한 주민을 돕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 독재체제를 돕는 것입니다. 북한을 지원한 돈이 거꾸로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살인 무기가 되어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4) 3대 세습으로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조선 노동당 창건 65주년에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인민군 대장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2010928일에 40년 만에 소집된 당 대표자 회의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면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화려하게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20111217일 김정일이 급성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한 이후, 실제로 김정은은 조선노동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 되었습니다. 예상했던대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체제가 형성된 것입니다. 국민들의 자유의사를 반영한 선거가 전혀 없이 강압적으로 3대로 세습된 것은,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어떤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일로, 국제 사회의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본래 노동자 계금과 그 전위인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철저히 봉건적 혈연주의를 반대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3대 세습을 강화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주의 체제에서조차 이탈한 것입니다. 북한에서 만든 대남 선전용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는 201011월에 김정은 청년 대장을 우러러 폭풍같은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라는 노골적인 우상화 찬양이 등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 태어난 21녀 가운데 차남으로 1983년생이며 현재 29세에 불과합니다. 이런 약관의 김정은을 서둘러 후계자로 삼은 것은, 자유를 억압하여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주민 통제를 강화하려 한 것입니다. 이는 김정일 일가 및 소수 기득권층의 계속적인 정권 장악을 위해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김일성 일가의 권력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 3대 세습을 강행하고 있지만, 이것은 체제 붕괴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3대 세습은 결국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수백만 명의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거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김씨 집안의 부귀영달마을 추구한다면 북한의 김씨 체제는 머지않아 반드시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5) 인권을 유린하며 정치 수용소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극심한 인권 유린 집단입니다. 대한민국의 인권에 대해서는 앞장서서 데모를 하면서도, 정작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 유린의 사태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은 비겁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도 그 실상을 밝히고 개선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1970년대 이후 북한은 김일성을 우상화하면서 그것에 반대하는 자들을 통제하고 제거하기 위하여 소위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수용소에 감금된 사람들은 2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20111113KBS 뉴스에 따르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정치범과 그의 손자가지 일가족 3대가 재판 없이 수감된다.”고 설명한 뒤, 북한 6개 수용소의 2003년과 2008년의 모습을 비교해보여 주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서 요덕 관리소와 북창 관리소의 건물이 늘어났음이 밝혀졌으며, 이것은 그만큼 수용된 정치범의 수가 늘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탈출한 한 탈북자는, “눈 위에 자유를 찾아갑니다.’라고 써놓고 탈출했던 한 탈북자가 잡혀서 다른 수감자들의 눈앞에서 총살당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수용소에 감금된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 심각한 영양실조, 고문, 공개처형을 통해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죄를 범했는지도 모르며, 단지 주변 가족이나 친척들 때문에 끌려온 사람들입니다.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 배급되는 식량은 350g 정도이며 사람들은 배급된 식량이 부족하여 보위원들의 감시를 피해 쥐를 잡아먹고 풀뿌리까지 캐서 먹을 정도라고 합니다.

20053월 일본의 N-TV2006년 미국 CNN에 보도된 것처럼 수용소에서는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공개처형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특히 수용소 내에서 구류장에 갇힌 사람은 아침 5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구류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폐인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면서 막대한 원조를 해 주었지만, 북한은 오히려 수용소를 더 강화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동안의 대북지원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유지시켜 주고 오히려 수많은 북한 주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6) 체제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계속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휴전 이후에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2,660여 회에 이르는 대남 군사 무력도발을 감행하였습니다.

 

 

 

구분

대남 도발 사례

박정희 정부

(1963-1979)

19681 21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미국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1969년 동해상공 미국 정찰기 EC121기 격추사건

1969KAL기 납북사건

1970년 국립묘지 폭탄테러(박대통령 암살미수)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전두환 정부

(1980-1987)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1986년 김포공항 폭파사건

1987KAL기 공중폭파사건

노태우 정부

(1988-1992)

4건의 어선 피랍(전원 귀환)

1건의 무장침투

김영삼 정부

(1993-1997)

1995년 부여간첩 침투사건
1996년 동해안(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1997년 이한영 피살사건(북한추정)

1997년 조선일보 및 KBS 테러위협

김대중 정부

(1998-2002)

1998년 속초 잠수함 침투사건

19991차 연평해전

20022차 연평해전

노무현 정부

(2003-2007)

대남 테러리즘은 거의 없음

20061091차 핵실험

이명박 정부

(2008-2011)

20087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

20095252차 핵실험

20091110일 대청해전

2010326일 천안함 피격사건

20101123일 연평도 포격사건

 

출처 : 김태준, 테러리즘-이론과 실체(서울: 봉명, 2006), 437.

고성혁, 북한의 도발과 한미연합훈련의 변천과정(조갑제 닷컴).

최근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대표적인 사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입니다.

2008711일 금강산 관광지구 경계를 넘어간 민간인 관광객이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북한은 2004129일 체결한 개성공업지구의 금강산관광지구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에서 '법질서를 위반했을 경우, 이를 중지 시킨 후 조사하고 대상자의 위반 내용을 남측에 통보한다.'라는 규정을 명백히 위반하였습니다. 분명히 북한 정규군에 의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의 정책에 결사반대하면서 데모에 앞장섰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이 관광을 갔다가 총살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침묵하며 한 사람도 제대로 말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다른 나라에서 총살을 당했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가만히 있지 말고 큰소리로 강력하게 항의하며 국민적 분노를 터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금강산 관광은 북한 체제의 반인권성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입니다. 북한은 남한의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도 주적(主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을 위해 금강산 지역에 살던 주민을 다 내쫓고, 금강산을 북한 주민의 출입금지지역으로 선정하였습니다. 북한 체제가 떳떳하다면 북한 주민과 관광객의 접촉을 막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북한에 자유가 없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북한 체제가 남한 체제보다 낙후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천안함 피격 사건입니다.

2010326일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하여 천안함이 침몰되었습니다. 그 결과 해군용사 46명이 순국하였고, 구출작전 중에 한주호 준위가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적 도발행위로 남북 정전협정과 기본합의서를 위반한 것입니다.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과 화폐 개혁의 실패로 민심이 흉흉한 상태에서 외부 도발을 통해 민심 이완을 막고 내부 체제를 결속시킴으로써 김정은에게 이어지는 권력승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천안함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2010519일 국제 함동조사단의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는, 북한의 잠수정에 의한 어뢰공격으로 폭침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근거는, 515일 침몰지역 인근 해저에서 쌍끌이 어선에 의해서 수거한 추진 프로펠러가 북한이 CHT-02D 공격어뢰를 남미에 수출할 대 함께 제공했던 카탈로그 설계도면의 프로펠러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한미정보당국은 천안함 폭침 2-3일 전후 북한의 사곶 기지에서 이탈했던 북한의 잠수함과 잠수정이 복귀했음을 식별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천안함 피격이 북한의 소행임을 밝힌 합동조사단 보고서를 국민의 80%가 믿었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앞장서서 데모를 일삼던 사람들 중에, 정작 대한민국 군인 46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이것을 대한민국 정부의 자작극(自作劇)이라 우기며 사실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소수의 좌파적 시각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대근은 천안함 침몰 북한 소행 주장은 보수 세력의 상상임신이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국론분열을 조장하여 자중지란을 초래하고 있으며,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마저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 결과조차도 믿지 않고 만약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했다면, 그들은 종북세력으로 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또한, 연평도 포격사건입니다.

20101123일 오후 234,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을 본격화할 때부터 북한은 서해 연평도의 우리 해병대 기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방사포로 추정되는 포탄 170여 발을 발사했습니다. 북한의 도발적인 포격으로 말미암아 해병대 군인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19537월 휴전협정 이래, 민간을 상대로 한 대규모 군사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포격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반도가 휴전 상태의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전쟁은 순식간에 발발할 수 있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 2011830일 수원지검 공안부(이태형 부장판사)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서해 연평도 포격에 대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글을 올리고, 북한의 통신과 신문 보도문을 유포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김모(43)씨를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연평도 포격으로 자식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이적행위입니다.

이러한 북한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안보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군사 전력을 증강시켜 북한의 어떤 도발행위에도 즉시 대처할 수 있는 총체적인 안보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맹목적인 대북지원은, 오히려 김정일을 이은 김정은 독재체제를 도와주는 것이며 선량한 북한 주민들을 더 큰 고동가운데 몰아넣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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