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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3)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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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해안 강릉 지역 전투

동해안 지역 방어는 국군 제 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이 맡았으며, 예하 제 10연대는 38선에, 21연대는 삼척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게릴라 토벌작전 때문에 각 연대에서 1개 대대가 각각 빠진 상태였습니다. 반면 인민군 제 5사단은 그 2배가 넘었으며, 여기에 제 945부대 및 제 766부대가 임원진, 정동진 등 해안으로 상륙하여 후방으로부터 협공했으므로, 8사단은 극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은 동해안 도로를 차단하여 국군의 증원을 저지하면서 강릉을 동측으로부터 위협하고, 인민군 제 5사단 주력의 진출에 앞서 지역 내 잔류 공비와 협동하여 후방을 교란하고자 했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제 10연대는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하지도 못한 채 적에게 밀리게 되었습니다.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전방진지가 순식간에 돌파되고 후방 해안지역에 적이 대거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자, 육본에 증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육군본부의 답변은 서울 방어가 더 긴급하므로 지원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 8사단은 전후방에서 침공하는 인민군과 천마봉, 모전리 등지에서 접전을 벌인 후, 27일에는 전투력을 수습하기 위해 일단 대관령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후 강릉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을 수행하던 중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충북 제천으로 철수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부전선에 배치된 국군부대는 전무하게 되었으며, 국군 제 3사단 23연대가 울진으로 북상할 때까지 인민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남하하였습니다.

 

북한군의 첫 타격을 입었던 옹진, 개성, 고랑포, 전곡, 포천, 춘천, 양양을 잇는 38선 일대에서, 국군의 방어진지를 기습 공격한 북한군의 전투력은 처음부터 아군의 2-3배가 넘었습니다. 따라서 중과부적이었던 국군은 불과 3일 만에 중요한 방어 지역을 모두 북한군에게 빼앗긴 채 뿔뿔이 후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마틴 대령의 전사(77)와 딘 소장 포로(7월 말)

맥아더 장군은 1950630일 트루먼 미 대통령으로부터 지상군 투입의 허가를 받자, 지체 없이 미 제 8군사령관에게 한국과 제일 가까운 일본 규슈에 주둔하던 제 24사단을 파견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195071일 오전 8, 24사단 21연대 1대대 B중대, C중대 406명의 병사들은 이다스께 비행장에 집합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 열차를 이용하여 대전을 거쳐 74일 평택에서 북상하여 오산에 도착하였습니다.

75일 새벽 4, 인민군 105전차사단 소속 전차 36대가 수원을 출발하여 인민군 4사단 16연대와 18연대 보병의 엄호를 받으며 내려왔습니다. 미군은 각종 포를 발사하여 전차에 명중시켰으나, 인민군 전차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포대원들은 3.5인치 로켓트포가 있어야 T-34전차를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스미스 부대에는 로켓트포가 한 문도 없었습니다. 결국 스미스 대대장은 철수 명령을 내렸고, 76일 안성에서 인원점검을 하니 250여 명이 남았고, 실종 및 전사자가 156명이나 되었습니다. 한편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34연대가 평택-안성 전투에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하여 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을 해임시키고, 2차 대전 때 용맹을 날렸던 마틴 대령을 34연대장에 임명하여 패잔병을 수습하였습니다.

77일 아침 6,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천안을 공격하였습니다. 전차 6대가 미 3대대 앞에 나타나 전차포로 공격하자 34연대의 3대대 장병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연대 지휘소가 위협을 받게 되자 마틴 대령은 포위망을 겨우 빠져나왔다가 직접 바주카포를 들고 전차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마틴 대령은 인민군의 전차포에 맞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마틴 대령은 죽음으로 인민군을 저지하였으나, 천안은 인민군 4사단에 의해 점령을 당하였고, 인민군 6사단은 온양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이후 미 제 24사단은 1950718일부터 20일까지 인민군 제 3, 4사단과 대전에서 격전을 치렀습니다. 최초로 한국 전선에 뛰어 들었던 미 제 24사단은, 경부축선에서 인민군 주력 3개 사단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켜 차후 반격에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확보해 준 고마운 사단이었습니다.

미 제 24사단은 인민군의 압도적인 전세에 전투병력 30%의 손실을 입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24사단장 딘 소장이 마지막까지 대전에 남아 있다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당시 52). 딘 소장은 후일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실종하게 된 경위를 말하였습니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계속 남하하던 중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옥천의 낭월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인민군에게 습격을 받은 차량과 부상병 수 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분승시키고 다시 남하하던 중 인민군과 격전이 있었는데, 병력 17명을 수습하여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가 부상병을 부축하여 서쪽 고지로 올라가 응급치료를 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상병들이 물을 달라고 하여 손수 수통을 들고 어둠속을 더듬어 물을 구하려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튿날부터 딘 소장은 산야를 헤매는 신세가 되었는데, 대전을 떠난 지 36일 만에(825) 전라북도 진안에서 한두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친절하게 모시겠다.’고 속이고서는 딘 소장을 인민군에 밀고하여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딘 소장은 체포되기 전 36일 동안 거의 물만 먹고 연명하였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인민군에게 항거하였습니다. 딘 소장은 3년간의 포로생활 끝에 19539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고 미 의회는 용감하였던 그에게 미 육군 최고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7) 노근리 사건(1950725-29)

미군 경계선에 접근하는 한국 피난민들이 정지 명령을 어길 경우 총격을 가하라는 방침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때문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 다리에 피신하여 있는 민간인 248명이 미군에 의해 학살된 사건입니다.

인민군 2사단과 미 27연대는 724, 하루 종일 308고지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미 포병이 로켓포를 가지고 인민군 전차 1대를 추가로 파괴하였으며 인민군과 미군은 포병전으로 하루 종일 쏘아댔습니다. T-80전투기도 나타나 인민군 보병과 포병과 전차를 공격하여 3대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27연대는 인민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724일 밤을 이용해 황간으로 후퇴하였습니다.

725, 인민군 2사단 2개 대대가 미군이 후퇴하자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우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미 27연대장은 2대대로 하여금 이들을 막게 했는데, 2대대는 105mm 곡사포 12문고 전차 9대로 인민군을 역포위하여 공격하였습니다. 포위된 인민군에게 미 폭격기가 나타나 폭탄을 투하하고 곡사포 12문과 전차 9대가 돌진하여 인민군 2개 대대가 전멸하였습니다. 27연대는 29일 김천과 왜관까지 후퇴하였습니다. 황간 전투에서는 인민군 2사단이 2천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결국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27연대도 전사 35, 부상 221, 포로 49명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바로 이때 일어난 것입니다.

1950725-26일 야간에 미 제 1기병 사단 7연대 2대대 병사들과 미 24사단 패잔병들이, 인민군 3사단과 2사단 일부의 공격을 받고 영동에서 황간 쪽으로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조선 공산당 경북도당 책임자 배철은 725일 오전 1030분 영동읍의 미 77포병부대와 61포병부대를 공격하였고 차량도 공격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포부대가 철수하면서 미군 1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또한 유격대의 의해 사단 사령부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유격대는 300여 명 규모였습니다. 남로당원들은 미군의 후방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면서 미군 포진지의 위치를 인민군에게 알려주어 미군의 많은 희생이 잇따라 발생하였으므로 미 제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피난민을 부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미군들은 피난민과 말이 통하지 않았고 피난민과 유격대를 식별하지 못하여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725일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은 황간 쪽으로 피난을 하였습니다. 피난민 약 500-600여 명이 하가리에 도착했을 때 미군들은 피난민을 제지하고 있었고,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부근에서는 미군의 후퇴 때문에 피난민을 도로에서 철길로 오르게 하였습니다. 이때 미군 전투기가 나타나 철로 위의 피난민을 공격하였고, 쌍굴 속에 있던 피난민까지 기관총으로 공격하여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 등 248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때 사격은 미 제 1기병사단 7연대 2대대가 하였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전쟁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조선전사 제 25권에 다르면 19507월 당시는 전쟁 초기로, 북한군은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후방 침투, 포진지 기습, 통로차단, 정보수집 등의 계략을 꾸몄다고 전합니다. 그 당시 실제로 이러한 피난민 속에 끼어 있는 인민군이 발견되었고, 그 때문에 미군은 피난민에 대하여 각별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혹자의 말대로 유색인종에 대한 미군의 인종차별 때문에 노근리 학살사건이 발생된 것은 더욱 아닙니다. 워커 사령관은 사건 당일 726, “전선으로 어떠한 피난민도 지나가게 하지 말 것. 만약 전선을 지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든지 발포하라.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경우 잘 분별하도록 할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근리 대량학살 사건이 발생한 726일 새벽, 인민군이 수백 명의 피난민들을 미 제 1기병사단이 설치한 지뢰지대에 몰아넣고 전진을 강요하였으며, 그 뒤에서는 4대의 전차와 보병이 총을 겨누어 이탈자를 사살하였습니다. 피난민으로 인해 지뢰지대가 개통되자, 미 제 1기병사단은 포병의 탄막사격으로 인민군의 접근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미군들은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섞여 있을 수 있으므로 긴장할 수 밖에 없었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던 것입니다.

이상 노근리 사건 내용은 노병천 이것이 한국 전쟁이다193-206쪽에 실려 있는 내용을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8) 낙동강 방어선 전투

- 195084일 새벽 1시를 기해 낙동강 일대에서 전개한 방어 전투

6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불법남침으로 개전 4일째에 수도 서울을 잃은 국군 주력은, 628일 한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73일까지 6일 동안 인민군 주공의 진출을 저지한 후 수원으로 철수하였습니다. 그 무렵 중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2개 사단은, 충주와 제천 일대에서 인민군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유엔군은 참전 결정으로 74일 이후 미군이 전선에 배치되었고, 이때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만회하기를 위하여 지연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21일 대전을 점령, 7월 말에는 낙동강을 도하함으로써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습니다. 6 25전쟁이 일어난 이후 북한군은 35일 만에 낙동강 전선부근까지 내려왔던 것입니다.

 

영덕 안동 상주 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한 북한군과 맞선 국군과 유엔군은, 8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에 84일 새벽 낙동강까지 철수하였습니다. 이에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 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부산교두부(釜山橋頭堡, Pusan Bridgehead)’라고도 하며, 또 미 제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설정한 최후 방어선이라는 의미에서 워커라인(Walker Line)’이라고도 합니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km, 남죽 160km의 타원형으로, 서북 첨단에 있는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 지점인 창녕 남지읍(南旨邑)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鎭東里)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이 방어선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에서 마산 대구 영천 포항 등의 전방 지역에 이르는 방사형(放射形)의 병참선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했고, 기동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왜관 북쪽 작오산(303고지)북단에 협조점을 설치하여, 그 남쪽 진해까지(X)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 3개 사단(24, 25사단, 1기병사단)이 담당하고, 왜관에서 포항까지(Y) 중동부 산악지대에는 국군 5개 사단(1, 3, 6, 8, 수도사단)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때 남한은 영토의 90%가 이미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가 있었던 위기의 찰나였기 때문에, 이 낙동강 방어선에는 대한민국의 존망과 국민의 생사가 달려 있었습니다.

 

한편 인민군은 수안보(水安堡)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으며, 미군 정면에 제 1군단(김웅), 국군 정면에 제 2군단(김무정)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9월 공세(1950.9.1-9.15)로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왔습니다. 대구 방어전투와 영천 전투 및 동해안지구 전투 등 많은 공방전 전개로 방어선이 돌파당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국군과 유엔군이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목숨을 건 처절한 방어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아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 긑에,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고 전 병력을 집중하였던 인민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아군은 6 25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공격태세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총 반격을 가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38선에서부터 300km 이상 길게 늘어난 보급로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아군은, 원조 병력과 장비가 부산으로부터 원활하게 보급되고 있었으므로 전세가 상승일로에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미군 폭격이 심해 병력손실이 컸고 겹친 피로와 보급의 결핍으로, 전력이 바닥나 있었습니다. 사력을 다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에 식량 보급이 제한되고, 탄약과 소총 보급마저 부족하게 되자 인민군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습니다. 한편 9월 초부터 2주간 전개된 북한군의 공격은 너무 치열하여, 당시 발생한 인명 손실은 6 25전쟁 전 기간을 통해 단위시간에 발생한 손실 중 최고를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대구 부근의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 포항, 안강-기계 전투 등이 있습니다.

 

다부동 전투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km,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과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908번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지점입니다.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가난한 삶이 싫어, 사는 동네 이름을 다부동(多富洞)이라고 불렀으며, 삼국시대부터 이미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국군은 임진강을 넘었고 한강을 넘었으며 이제 마지막으로 낙동강을 넘었습니다. 이 강을 넘고 나면 더 이상 넘을 강이 없었고 대한민국의 마지막 교두보인 부산(釜山)이었습니다. 이 방어선을 구축하여 대구를 방어하는 것은 부산을 방어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만일 그곳마저 잃어버렸다면 미군은 전략적 가치가 없는 제주도를 지키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때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대구를 방어하는 데 다부동이 지형적으로 가장 적지라고 판단, 반드시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비장한 각오로 부하들에게 알렸습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귀관들은 모든 힘을 바쳐 마지막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19508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였던 시기였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여 전승을 경축하고자 했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구 방어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교두보인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해지고 대구는 북한군 공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므로, 그야말로 다부동 방어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1, 13, 15사단)을 투입,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 왔습니다.

국군 제 1사단은 보충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한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가 전부였으니, 군사력에 있어서 전력은 절대 열세였습니다. 병력 수에 있어서는 북과 남이 21,500 7,600(3:1)으로, 화기(火器) 면에서는 690문 대 172문으로, 화기의 성능 면에서도 북한군의 화기가 10배나 강했으므로 국군의 전력은 인민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습니다.

84일 오전 7,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 방어지역인 낙정리 일대에서 다부동 전투의 첫 포성이 울렸습니다. 강 건너에서 북한군이 쏜 45mm 대전차포가 연대장의 지프 옆에 떨어져 차가 도랑에 빠지자, 이것을 신호로 북한군의 사격이 집중됐습니다. 한 달여 동안 후퇴만 해 온 국군을 얕잡아 본 인민군들이 강이라는 하천 장애물을 무시하고 달려들었으나, 아군 진지 앞의 깊은 수심에 당황하여 전진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이때 예광탄 한 발이 적진의 하늘을 날아왔고, 이것을 신호로 아군의 일제 사격이 개시되어 순식간에 낙동강은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후속 공격을 감행하려던 적은, 아군의 집중포화에 산산이 흩어져 아군의 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월간조선 200210월호)

 

낙동강 방어선 편성 직후 방어 정면이 너무 넓어 부대 간 연결이 힘들다는 어려움 때문에, 811일부로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작오산)-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각 사단에 전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백선엽 준장의 국군 제 1사단은 12일 야간 다부동 일대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다부동 전면의 험준한 유학산 839고지, 좌측의 숲데미산(수암산) 518고지와 328고지, 우측의 신주막-대구 간 도로의 방어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한편 북한 인민군은 국군 1사단의 방어선을 담숨에 붕괴시키고 대구를 장악하기 위하여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 인민군 제 15사단은 국군 제 15연대(최영희 대령)가 사수하는 숲데미산(수암산)328고지를, 1사단은 제 12연대(박기병 대령)가 사수하는 유학산 정상 부근의 높은 절벽과 같은 고지대를 점령하려 했습니다. 동쪽의 계곡 접근로에는 인민군 제 13사단이, 국군 제 11연대(김동빈 대령) 방어선을 붕괴시킨 후 신주막-다부동-대구 간 도로를 이용해 남하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국군 1사단이 미처 방어선을 편성하기도 전에 북한국 제 3, 13사단이 공격해 왔으므로 중앙이 돌파될 위기를 맞았습니다.

국군 15연대가 328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전개했고, 국군 11연대는 적이 전차 7대를 앞세우고 연대 규모로 공격해 왔으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군 12연대는 수암산에서 유학산에 이르는 정면을 담당했고, 8사단 제 10연대의 1개 대대가 증원되었으나,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를 점령당하여 813일 오후부터 837고지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이렇게 발발한 다부동 전투는 13일부터 29일까지 16일간 전개되었으며, 유학산 839고지의 경우 81일부터 924일까지 무려 55일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특히 815일 북한군 제 15사단에게 함락된 숲데미산(수암산) 탈환을 위해, 박기병 대령이 연대지휘소까지 부연대장 김점곤 중령에게 맡기고 대대지역에 나가 직접 전투지휘를 하였으나, 12연대 2대대는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낼 만큼 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유학산 일대의 싸움은 사격전보다도 휑한 돌산의 정상을 두고 수류탄이 모자랑 정도로 서로에게 수류탄을 던져대는 근접전투가 계속되어, 양 군은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12연대 부연대장 김점곤 중령의 증언에 의하면, 신임 소위가 산에 있는 자기 소대를 찾아가다가 포탄에 맞아 그대로 전사하기 일쑤여서 장교가 극도로 부족해졌기 때문에, 결국에는 150명의 연대본부 요원 전부를 소대장 및 분대장으로 임명해서 전선으로 보냈고, 그 빈자리를 150명의 여고생으로 채워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 8군 사령부는 낙동강 대안(對岸)의 적의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816일 오전 1158,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26분 동안 무려 3,234, 960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미 공군은 북한군의 주력이 몰려있을 것으로 판단한 낙동강 서쪽의 직사각형 지역(5.6×12km)을 대상으로 26분간에 걸쳐 양탄자를 깔듯이 빈틈없이 폭탄을 투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군의 병력과 장비에 큰 피해를 준 B-29 융단폭격(Carpet Bombing)입니다. 그 후로 이 지역에서는 10년 동안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대구 공격은 신주막-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어, 816일 다부동 바로 서측을 공격하여 국군이 큰 위기에 놓였습니다. 818일 새벽에는 대구역 부근에 박격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대구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라는 피난령을 하달했습니다. 국군 1사단은 위기 상황 타개를 위해 18일에 지원된 미 제 27연대와 연합작전으로 적진 돌파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했고, 12연대는 817일 우리의 주보급로인 997번 도로변 517고지까지 점령당하여, 사단 좌측 방어지역이 언제 돌파 당할지 모를 위기를 맞았습니다. 12연대장 박기병 대령이 1대대 관측소까지 나아가 837고지 탈취를 독려했으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12연대는 공격을 계속하여 23일까지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 날이 밝으면 공격하고 또 공격했습니다. 마침내 1대대가 23일 새벽 2,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8일간 9회에 걸친 백병전으로 1,000여 명의 손실을 본 끝에 유학산 837고지를 탈환했습니다. 유학산 주봉839고지를 공격한 3대대도 23일 아침 6시쯤 별 어려움 없이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아군이 유학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육군총참모장, 방한 중이던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워커 미 8군사령관이, 동석동 동명초등학교에 위치한 사단사령부를 찾아와, 1시단의 용전을 치하했습니다. 백선엽 사단장도 후에 그의 회고 기록에서 최초 Y 방어편성 시 9에 달하는 넓은 정면을 12연대에게 맡길 만큼 12연대를 신뢰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2연대는 29, 30일에 수암산-유학산 방어진지를 미 7기병연대에 인계하고 다부동에 집결했습니다.

 

이렇듯 국군 1사단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해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방어선에 갓 배치된 많은 신병들이 북한군의 함성소리와 쉴 새 없이 날아들어 작렬하는 박격포탄 속에서 동요하고 흔들리자, 백선엽 사단장은 직접 착검한 M1 개런드 소총을 쥐고 돌격의 선두에 나섬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고조시켜, 대구가 점령당할 뻔한 큰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선교 ,6·25전쟁 막을 수 있었다73-74쪽에 소개된 글을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819일 밤, 북한군이 동명초등학교의 1사단 사령부를 기습하여 백선엽 사단장이 위기에 처했을 때 10연대 1대대가 북한군을 막아 백 사단장은 목숨을 건졌다. 23연대도 증파되었고, 10고사포 군단도 증원되었다.

821일 미 27연대와 국군 11연대는 인민군을 공격하여 상림리까지 밀고 올라갈 계획으로 공격에 나섰다. 인민군도 대구를 점령해야 부산을 갈 수 있어 다부동에서 공방만 할 수 없으므로 사력을 다해 공격해 왔다. 국군 11연대 1대대 김재명 소령 부대가 인민군의 공격으로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448고지도 빼앗기고 장병들은 고지에서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들은 아예 능선을 타고 다부동까지 도망쳤다. 인민군은 11연대 1대대의 뒤를 추격하여 다부동 능선까지 내려와 미 27연대 후방을 차단할 작전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27연대장 마이게레스 중령은 공격하다가 순식간에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빠졌다. 그는 즉시 워커 장군에게 한국 부대는 전의가 있는 것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좌측의 부대가 무단으로 퇴각하여 우리 연대의 좌측 배후에 약 1.000여 명의 북한군이 침입했다. 연대는 바로 퇴로가 차단되려 하고 있으며, 이대로는 이 이상의 방어는 불가능하다.”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백 사단장에게 좌측의 11연대가 강력한 공격을 받고 철수하고 있다. 빨리 진지를 탈환하지 않으면 우리 연대도 이 이상 저지할 능력이 없다, 조만간 철수할 필요가 생길지 모른다.”라고 보고하였다.

백 사단장은 이 보고를 받고 미 27연대가 다부동을 철수하면 인민군 13사단은 즉시 대구를 점령할 것인데 국군 1사단이 위기에 처할 거라고 판단했다. 백선엽 1사단장은 미 27연대장에게 내가 돌격해서 448고지를 탈취할 테니 포병의 지원을 부탁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후퇴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장병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이 점령되고, 그러면 우리는 죽든지 포로가 된다, 부산에서 죽을 바에는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다. 지금부터 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저 산을 돌격할 것이다. 귀관들은 내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나면 나를 쏘아라! 그러나 귀관들이 후퇴하면 나는 가차 없이 귀관들을 쏠 것이다. 가자!”라고 하며 백선엽 장군이 앞장을 서자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이 뒤를 따랐다. 장병들은 차마 사단장의 뒤를 따를 수 없어 앞을 다투어 448고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448고지를 점령하고 방심해 있던 북한군은 국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 시작 30분 만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11연대 1대대는 448고지를 점령하여 만세를 불렀고, 이렇게 해서 821일 다부동에서의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해 신병과 학도병을 보충했고,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들이 배치되어 전투원의 식사를 준비하고 탄약과 기타 보급품을 지게로 최전방까지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있던 제 1훈련소장이었던 최석(崔錫, 예비역 중장) 장군은 모병에 대해 민족의 증언(중앙일보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낙동강 공방전이 전개될 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병력보충이었습니다. 연일 혈전이 벌어지니까 소모가 엄청난데 이를 빨리 보충해야 하니까요. 8월 초에 대구에서 교육대라는 명칭으로 내가 책임자가 되어 신병모집훈련소를 차렸어요.

며칠 후 제 1훈련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9개 대대가 있었어요. 1개 대대는 2,000-2,500명 정도지요. 입소 신병은 7일간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급할 때는 2-3일간 소총사격 훈련만 시켰고, 더 급할 때에는 사격장으로 가다가 도중에 그대로 일선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보통 하루에 제 1훈련소에서 500-600명을 일선에 보충했는데 많을 때는 2,000-3,000명을 일선에 보낸 적도 있어요. 특히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신편할 때에는 보충해 줄 병력이 달렸어요. 그럴 때는 기간(基幹) 사병들이 길거리를 막고 원주민이나 피난민 할 것 없이 20-35세까지의 청장년을 급모(急募)해 보냈어요. 비상시인 만큼 이런 비상수단을 안 쓸 수가 없었지요.

그때 신병을 일선에 보낼 때는 하루 전에 집에 보내 가족과 면회하도록 했어요. 그래도 도망치는 신병은 별로 없었어요. 이 점은 참 감명 깊은 일이었습니다. 또 빼달라고 소위 을 쓰는 사람도 없었고요. 8월 초부터 하순까지 훈련시켜 일선으로 보낸 신병은 약 5만 명 정도 됩니다.

왜관- 다부동 전선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4개 사단의 주공축선(主攻軸線)이었고 국군도 최종적으로 지켜내야만 했던 주()방어선이었으므로, 6·25전쟁에서 최고의 견적지 중 하나로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83일부터 12일까지 다부동에서 군군 제 1사단이 미군( 미 제 1기병사단)과 더불어 북한군 4개 사단(1, 3, 13, 15사단)과 싸워 거둔 전과는 적 6,867명을 사살하였고, 813일부터 30일까지 5,690명을 기록했으니 8월 한 달 동안에만 12,000명이 넘었습니다. 기간 중 노획한 적의 장비는 소총 2,297, 기관총 54정이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전사자는 국군 2,016, 미군 1,282, 경찰 111명 등 총 3,409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유엔군 참전

1950628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8시간의 마라톤회의 끝에, 북한의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과행위로 규정하고 파병 결의안을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찬성 7, 반대 1, 기권 2(인도, 이집트)로 가결하였습니다.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629일 직접 전선을 시찰, 30일 미 국방부의 허락으로 지체 없이 제 24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71일 부산에 도착했고, 이것을 시작으로 이어서 미 제 24사단 주력 부대들도 속속 부산에 상륙하였습니다.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무기를 지원한 영국은 항공모함 1, 순양함 2, 구축함 및 프리깃함 5척을 파견하였고, 629일에는 오스트리아가 구축함 1척과 프리깃함 1, 무스탕 전투기 1개 대대, 네델란드도 구축함 1척 지원을 제의했습니다. 이후 추가제의가 나오지 않아 유엔사무총장이 요청 서신을 발송하자, 7우러 중순 이후 참전지원 회원국 수가 현저히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714일 프랑스가 1척의 초계정을 파견했고 이어 1개 보병대대를 파견했으며, 720일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각각 1개 대대규모의 독립된 부대를 파견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투기 없이 조종사와 지상근무요원 대대를 파견했습니다. 이밖에 덴마크, 스웨덴, 인도, 이탈리아 등은 의료부대를, 노르웨이는 부대수송용 선박을 파견하였습니다.

 

8월 초에는 캐나다가 3개 대대 지원을 제의하였고, 영국이 820일 보병 3개 대대(7,000명 규모) 중 선발대 2개대대를 파견하고, 이어서 호주 1개 보병대대(1천 명), 뉴질랜드 1개 포병대대(1천 명) 파견을 제의하였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영연방국가가 아닌 터키(4,500여 명), 태국(4,000여 명), 필리핀(5,000여 명), 그리스(수송기 6, 3,800여 명)가 부대 파견을 제의했습니다. 특히 태국의 참전은 유엔의 조치가 아시아에 대한 백인의 전쟁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을 잠재우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은 823일까지 7개국으로부터 약 25,000명의 지상 전투병력을 지원받고, 95일까지는 4개국의 파병도 추가로 승인되었습니다.

7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참전한 유엔 회원국들을 미국의 통일된 지휘 아래에 두었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714일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북한군에게 연속 패배를 당하여 밀리자, 맥아더 장군은 계속해서 증원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724일 제 29연대, 731일 제 5연대전투단, 그 다음 주에는 제 1임시해병여단과 제 3사단의 2개연대가 도착하여 낙동강 방어선으로 급히 투입되었습니다. 829일에는 영국이 홍콩에 주둔 중이던 제 27여단을 파견함으로써, 한국전쟁에 두 번째로 많은 지상군을 파견한 국가로 기록되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의 증원으로 군수지원 수요가 증가하자, 825일 주일(駐日)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여 주한 유엔군에 대한 군수지원 임무에만 전념하였고, 828일에는 미 제 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군수사령부가 일본에 창설되었습니다. 기존의 부산 군수사령부는 9182군수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피난민 구호는 개전 초기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19507월 말, 유엔군이 지연전을 마감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무렵 부산으로 철수한 피난민들의 무질서한 판자촌이 형성되면서 구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731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민간원조를 의결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엔회원국국제기구, 민간단체들로부터 식량, 의약품, 생활용품, 원자재 및 금융지원 제의가 잇따랐습니다.

한국전 참전 유엔국 16개국과 참전인원은 미국(302,483), 오스트레일리아(2,282), 캐나다(6,146), 뉴질랜드(1,389), 영국(14,198), 필리핀(7,000), 터키(5,455), 네덜란드(1,700), 룩셈부르크(44), 콜롬비아(1,068), 벨기에(900), 에티오피아(1,271),

프랑스(1,119), 그리스(1,263), 남아프리카공화국(826), 태국(1,294) 등입니다.

 

안강-기계지구 전투

청송-죽장-기계 축선에 전개한 인민군 제 12사단은, 이미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에 침투한 제 766부대와 연결하여 증가된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을 국군이 예상하지 못한 지역으로 투입, 88일 죽장을 점령하고 89일 기계를 점령한 후 포항으로 진격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민군 12사단이 국군과 유엔군의 첩보수집기관에 포착되지 않고 기계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의 제 766부대가 공격축선을 개척하고 국군의 관심을 타 방향으로 돌리는 양공을 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강 북쪽 8.5지점에 있는 기계는 성법령에서 발원하여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달성천 유역에 형성된 너비 1-2의 회랑 안에 있는 촌락으로, 죽장과 포항 도로가 동-서로 이어진 전술적 요지입니다.

경북 영일군 기계면 현내리(현 경북 포항시 북구 현내동) 남쪽에는 9개의 봉우리가 연결된 고지군(일명 구련봉)이 북쪽을 향하여 횡격실을 이루고 있으므로 방어에 유리했으며, 안강과 경주 방어를 위한 전초지역으로서 매우 중요시되는 지역이었습니다.

육본은 기계-안강 축선의 위기를 직감하고 대구에서 창설된 제 25연대를 기계로 급파한 데 이어, 다음날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기계, 포항지구의 방어임무를 맡겼습니다.

포항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부대는, 17연대와 해군육전대를 포함한 부대들로, 모두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학도병과 대한청년단원 그리고 신병으로 신편된 부대였습니다. 부대 구성요원들은 대부분이 불과 몇 시간의 훈련밖에 받지 못한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그 전투임무 수행능력은 매우 낮았습니다.

811일 새벽 4, 북한군 12사단 소속 3,000여 명과 766부대 병력이 포항을 공격하였습니다. 브래들리 준장 부대가 특수임무를 받아 오천비행장으로 이동하는 중, 안강 터널 입구에서 766부대의 공격을 받고 100여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이때 교전에는 나이 어린 학생들과 훈련도 받지 못하고 전투 경험도 없는 학생들이 꽤 있었습니다. 당시 김두한 청년부대와 학도병 3천여 명은 99식 소총 한 자루씩만 가지고 방어하고 있었는데, 오후 123026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한 후 북한군이 포항을 점령함으로써 국군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포항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워커 중장은 오천비행장의 미 F-51, 613전투대대를 즉시 일본으로 철수시켰습니다.

 

811일 포항을 점령한 인민군 제 12사단은 제 5사단 일부 병력을 증강하여 안강, 경주로 남하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형산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이 있었고, 워커 장군이 오천비행장을 반드시 확보하라.’라는 특명을 내려 편성된 미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가 현지에 급하게 출동하였습니다. 이에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오천비행장을 탈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강구를 점령한 적의 제 5사단 역시, 남정 일대에서 고립된 국군 제 3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남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형상 포항, 경주 간에는 직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진로가 없으며, 오직 구룡포와 감포를 경유해야만 하는 해안로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의 8월 공세 최종 목표인 경주를 점령하려면 기계-안강-경주 축선으로 기동해야 했습니다.

 

813, 기계지구에 투입된 국군 제 17연대는 안전고투 끝에 겨우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안강에 집결하였으며, 1군단은 이날부로 제 17연대를 수도사단으로 배속 변경시켜, 안강-기계지구 작전을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17연대 제 3대대와 진지를 교대하여 안강으로 진출한 국군 제 1연대는, 북한군의 활동이 급속도로 증강되어 작전 시초부터 차질이 생겼으며, 쌍방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이 3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816일 유엔군의 근접항공지원을 받아 제 17연대와 더불어 기계 남쪽에서 적을 포위할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군 제 1연대는 817일 모든 전투력을 총집중하여 공격을 개시, 계속 진격하여 결국 북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대구 북방 다부동지구와 보현산 일대의 전황은 매우 위급한 상태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10연대는 18-19일 양일간 다부동으로 이동하여 그 지구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기계, 안강전투는 국군 제 1군단이 계획하고 단행한 공격작전이었으며 거듭된 격전 끝에 승리하여, 동부전선에 조성된 일대 위기를 극복한 의의 깊은 전투였습니다.

 

영덕-포항 전투(학도병 71)

717일 포항 방어를 위한 마지막 보루인 영덕을 빼앗기자, 8군의 지원을 받은 국군 제 23연대가 반격을 감행하였으나 빼앗고 빼앗기는 혈전을 반복하였습니다.

7월 중순부터 영덕, 강구지구에서 교전 중이던 적 제 5사단은 안간힘을 다해 근근이 국군 제 3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하여 89일 강구를 점령하고 11일 아침에는 거의 무방비의 상태였던 포항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렇게 동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을 점령당하여, 오천비행장이 위협받게 되고 국군 제 3사단이 고립되는 상황이 전개 되었습니다.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는 민부대를 형산강변에 투입하여 포항 탈환 준비에 착수하였습니다.

한편 810 초저녁 포항 여자중학교(현 포항 여자고등학교)에 위치한 국군 제 3사단사령부에서는 71명의 학도병들이 신품 M1 소총과 실탄 250발씩을 지급받아 무기를 손질하였습니다. 그 무렵 이미 인민군 제 12사단의 1개 연대 병력이 포항으로 접근 중에 있다는 첩보가 있었는데, 이윽고 811 03:00시쯤 국군 제 25연대 제 9중대와 북한군과의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국군 제 3사단사령부는 학도병 71명으로 사령부를 방어하게 하였고, 학도병들은 학교 운동장 울타리에 의지하면서 학교에서 시내로 통하는 도로를 경계하였습니다. 04:00 6발의 예광신호탄이 올라 새벽 하늘에 포물선을 그렸고, 얼마 뒤 학교 정문 100m 앞에 정체불명의 병력이 나타났는데, 적의 행렬이었습니다. 그들이 50m 전방에 이르렀을 때 학도병 중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했고, 기습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순식간에 약200여 명이 쓰러졌습니다. 날이 밝자 잠시 흩어졌던 북한군의 공격이 재개되어 학도병들은 이에 맞섰으나 실탄이 다하여 맨주먹으로 적이 던진 방망이 수류탄을 다시 집어던지며 혈전을 전개하였습니다. 15:00 까지 학도병들은 온갖 힘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실탄도 없고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도병들은 그곳에서 새벽 4시부터 11시간 동안이나 격전을 치르는 동안 47명이 전사하였고, 14명은 부상당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4명은 탈출하여 반격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비록 포항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이들의 분투로 적의 포항 시내 진출이 지연되어 제 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및 경찰, 행정기관 등이 무사히 안전지대로 철수할 수 있었고, 특히 군 보급품을 손실 없이 후송할 수 있게 되어 차기 작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포항을 잃은 후에도 계속 인민군 제 5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 3사단이 점점 곤경에 빠져들게 되자, 816일 국군 3사단 김석원 사단장은 즉시 장사동을 철수하여 구룡포에 상륙한 후 포항을 탈환하기 위해 장사동에서 해상철수를 하였습니다. 장병 9,000여 명, 경찰 1,200여 명, 일반인 1,000여 명의 병력이 희생자가 전혀 없이 8171030분쯤 포항 밑의 구룡포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816일 투입된 민부대는, 유엔군의 협조로 포항 탈환의 기회를 포착하여 81804:00시 포항 시내에 진입하였습니다.

 

826일 북한군은 야간 대규모 공격으로 다음날 새벽 무렵 기계를 재점령하였고, 또한 북한은 9월 대공세로 94일 북한군 5사단이 포항을, 북한군 12사단은 안강을 점령하였는데 , 국군의 반격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혈전을 계속하였습니다.

 

낙동강 돌출부(영산 돌출부) 전투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 방어지역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영산은, 행정구역상 경남 창녕군 영산면으로 굽이쳐 내려오던 낙동강이 서쪽으로 돌출해 마치 반도처럼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이 때문에 창녕과 영산 부근을 흔히 영산 돌출부 또는 낙동강 돌출부라고 부릅니다. 북한군 입장에서는 여러 곳에서 동시 도하할 경우 포위 공격이 가능한 데 비해, 미군 입장에서는 동쪽으로만 아군 지역과 연결되어 있는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현충에서부터 남지까지 방어정면을 미 제 24사단이 맡아, 북한군 제 4사단의 공세를 힘겨운 혈전으로 막아 내었습니다.

 

미 해병 1여단은 93일 아침부터 영산 방면에서 강력한 반격을 시작했는데, 영산을 방어하고 있던 미 2사단도 함께 동참했습니다.

미 해병 1여단은 미 해병대 중 최상의 전력을 자랑하는 부대로, 영산 돌출부에서도 시원스럽게 반격작전은 감행하여, 94일 북한군 9사단 사령부가 위치했던 장소를 탈환했습니다.

95일에도 전진을 계속해 오봉리 능선을 점령하고, 2사단 9연대도 영산 돌출부의 중심인 클로버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북한군 9사단은 거의 괴멸되었습니다. 이후 미 해병 1여단은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해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습니다.

 

국군 8사단 영천 전투(195094-11)

영천은 대구에서 34, 경주에서 28거리에 위치하여 영천을 중심으로 대구, 경주, 포항, 안동, 청송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만약 이 지역을 빼앗긴다면 국군 제 1군단과 2군단은 분리되고, 포항-안강-대구로 연결되는 국군의 유일한 횡적 병참선이 차단됩니다. 영천을 발판으로 북한군이 대구로 진출할 경우 낙동강 방어선이 후방에서 무너지고, 어울러 영천부터 경주, 부산으로의 통로가 개방됨으로써 부산이 일거에 무너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이든 국군이든 영천은 사활을 건 한판 승부의 장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95092일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명령하여, 북한군 15사단도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 12연대의 방어로 공격이 여의치 않자, 작전을 변경하여 방어가 허술한 영천을 일제히 공격하였습니다. 국군 8사단은 3일 새벽 16연대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철수 했다가 4일 오후까지 방어선을 재편성, 왼쪽부터 21연대, 16연대, 3연대 1대대, 7사단 5연대를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 15사단 50, 56연대는 9501:00시 각종 포의 지원 하에 전차 5대를 선두로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단숨에 중앙의 16연대, 3연대 1대대와 좌우측의 21, 5연대 등을 붕괴시키고 16진격하여 이날 오전 영천 동북쪽 고경면 단포동을 점령하였습니다. 96일 새벽 3시에는 영천 시내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이는 국군과 미군이 부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북한군 15사단이 경주를 점령하면 오천비행장을 점령하게 되어 미군이 작전수행을 못하며, 영천 왼쪽의 대구를 공격하면 대구 북쪽의 국군과 미군이 포위 되어 영천 오른쪽의 안강-경주-포항방면 전선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선 붕괴 직전의 위기에서, 유재흥 국군 2군단장은 즉시 군단 작전회의를 소집, 1, 6사단장 및 참모들과 대책을 논의하여 우선 국군 8사단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해 적 15사단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해 8사단에 배속, 7사단과 함께 영천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차였습니다.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은 전차 1개 소대(5)만 있다면 적에서 큰 위협이 되고 아군의 사기를 울릴 수 있는 판단 하에,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만나 요청했으나 신중히 생각해 보자고만 하였습니다. 다시 미 8군 사령관 워커중장에게 사정하자 게이 소장과 협조해 보라고 할 뿐 확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미군 측에서 내일 아침부터 미군 전차 1개 소대가 지원할 것이라고 통보해 왔습니다.

이렇게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워커 장군은 정일권 총장에게 영천을 탈환하지 못할 경우 미 8군은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 한국군 2-3개 사단을 포함, 10만 명의 요인을 괌이나 하와이로 철수할 것이니 준비하고, 이 일은 극비로 해 달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말도 안 된다며 비록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처지였지만,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목사님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어 구덕 운동장에 모든 선교사들, 목사들, 장로들, 성도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또한 많은 목사님들이 부산 서대신동 항성교회에 모여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였습니다. 초량교회와 광복교회에서도 회개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97새벽부터 국군 19, 21연대 등이 수차례 공격과 기습으로 큰 전과를 올리고, 다음날인 8일 오후 245 영천을 탈환했습니다. 이날 적의 돌파구 봉쇄를 위해 영천을 중심으로 적의 진출로를 따라 북쪽 21연대에서 남쪽 5연대까지 낚싯바늘 모양의 방어선을 형성하였습니다.

99 국군 2군단은 8사단 16연대와 21연대, 7사단 5연대와 8연대,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 등 영천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6개연대를 모조리 공격에 투입, 북한군을 완전히 감싸며 포위망을 구축한 국군 2군단은 10일부터 총 반격에 나섰습니다.

이로써 5일 동안 차단됐던 영천-경주간 도로가 완전히 개통되고 영천 북쪽까지 밀고 올라가, 912 마침내 9월 공세 이전 8사단의 주저항선을 회복하였습니다. 반면 북한군 15사단은 전사 3,799, 포로 309, 전차 5대 파괴, 장갑차 2, 차량 85, 소총 2,327정 상실 등 사실상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낙동강 전선 붕괴라는 최악의 위기 순간을 극적인 승리로 전환시킨 영천 전투는, 이후 성공률 5,000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영천 위기가 수습된 후 912일 미 1기병사단 7연대 3연대대의 역습이 성공하고, 국군 1사단도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을 탈환함에 따라 대구의 위기도 안정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경주방면과 동해안에 새롭게 투입된 미 24사단이 방어전에 힘을 보탰고, 국군 수도사단과 3, 8사단이 선전함에 따라 913일 무렵에는 동부전선도 원래의 방어선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 작전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해군과 공군의 막강한 지원 때문이었습니다. 7월 중 근접지원 출격 대수는 4,349대였고, 8월 중에는 7,028대로 증가하여 1개 사단마다 일일 평균 40대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는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불리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브래들리 집단군의 각 사단이 지원받았던 것을 능가한 것이었습니다. 해군은 함포지원 외에도 증원 병력 수송, 북한군 해상보급로 차단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지상군이 낙동강선으로 철수했을 무렵, 하와이와 미 본토로부터 증원부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증원부대는 미 제 5연대전투단, 미 제 2사단 제 9연대, 미 해병여단, 미 제 555야포대대, 89전차대대와 M-26 퍼싱전차 등이며 병력도 보충되었습니다. 한미연합군의 반격전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때를 같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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