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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2)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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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던 남한의 상황

 

(1) 195062324(전쟁 하루 전), 비상 경계령 해제

경계강화조치는 51일 노동절을 전후로 총 26, 530일 총선거를 전후로 총 25, 611일 북한의 평화공세(북쪽의 조만식과 남쪽의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는 제의)를 전후 총 13일을 실시하였습니다.

 

*경계태세 발령(1950.4.7-6.23)

 

구분

노동절

해제

(7일간)

5.30총선

(25일간)

해제

(10일간)

평화공세

(13일간)

해제

대기태세

4.75.3

5.35.9

5.96.2

6.26.11

6.116.23

6.24

00:00

경계태세

4.295.2

5.276.2

 

 

이렇듯 휴가도 통제된 상태로 대기령과 비상경계령이 계속 되었지만 곧 일어날 것만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육군본부는 611일부터 발령된 전군 비상경계령을 625전쟁 발발 하루 전날인 624일 자정을 기해 해제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많은 장병들은 너도나도 그동안 미루어 둔 휴가를 떠나고 나머지 장병들도 외출, 외박을 나갔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부대가 많게는 3분의 2, 적게는 절반 정도로 최소한의 병력 수준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영내대기 장병수는 군 복무규정과 육군본부가 요구한 범위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그나마도 부대 내에 남아 있던 장병들까지 긴장이 풀린 상태였습니다.

625전쟁의 베티고지 영웅으로 불리는 김만술 씨는 그의 저서에서 당시의 외출이 갑작스러운 것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개월 만의 외출

1950624, 토요일-흐린 날씨는 아니었으나 후덥지근한 습기가 몰고온 회갈색 구름이 하늘에 얼룩져 널려 있었다-불쾌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3개월 만에 외출허가, 부대에 내려졌던 비상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외출과 비록 기다렸던 외출이라 하여도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라 날씨조차 개운하지 않았다.

뜻밖에 사실에 접한 동료들과 나는, 이런 비상시 외출허가는 긴박한 사태가 해결될 경우나 혹은 다음에 일어날 긴박한 사태에 대비한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외출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들이 복잡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 중에 우리에게 주어진 외출은 행운이라는 생각에 곧 복잡한 마음을 지우게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사아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하여 부대입구를 나섰을 땐 어느덧 구름은 걷히고 아침 해가 중천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시각이었다.

진록색 아카시아가 머리를 내민 철조망 사이에서, 외출로 들뜬 군내의 차단된 부대 옆길을 끼고 걸으며 나는 불안과 흥분된 마음을 열심히 달래고 있었다.

3개월 만의 외출, 무엇을 할까?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외박 허가가 나왔을까?

 

(2) 1950610, 군 부대 이동과 지휘관급 인사이동

북한은 이미 공격부대의 전방 이동이 완료된 상태였고, 국군은 610(전쟁 발발 15일 전) 대대적인 군 부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전발 38도선에 배치된 제 6, 7, 8사단의 3개 사단장의 인사 이동이 있어, 군 경계 태세는 완전히 해이해진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임명된 신임 사단장들이 임명 날짜보다 늦게 부임하는 가 하면 군 부대 이동 명령을 받았으나 625전쟁 발발 전에 미처 도착하지 못한 부대도 있었습니다.

2연대가 수도사단에서 춘천 6사단으로 배속되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느라 정신없을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의정부 7사단 25연대도 갑작스런 군부대 이동 명령으로 온양에서 출발하여 의정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인민군의 남침을 당하였고, 수도사단 8연대 역시 예비연대가 없는데다 620일 홍천에서 이동 명령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하여 초전에 방학동 수유리에 방어하지 못하고 대패하였습니다.

 

게다가 채병덕 참모총장은 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보고받고도 610, 사단장과 연대장의 대부분을 교체하는 초유의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12군데 사단장을 일괄 교체하였습니다.

유재흥 준장 2사단장 의정부 7사단장(전방 사단장)

김종오 대령 참모학교 원주 6사단장(전방 사단장)

이성가 대령 16연대장 강릉 8사단장(전방 사단장)

이종찬 대령 국방부 1국장 서울 수도사단장(서울방어 사단장)

이형근 준장 8사단장 대전 2사단장

이준식 소장 7사단장 육사 교장

신상철 대령 6사단장 육본 인사국장

강문봉 대령 작정국장 미 참모대학

김점곤 중령 12연대 부연대장 정보국 차장

장창국 대령 참모학교 부교장 작전국 국장

박림항 대령 3연대장 작전국 차장

정래혁 중령 참모학교 작전국 과장

 

일선 사단장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제 1사단장도 당시는 참모학교에서 교육을 받느라 전쟁이 터졌을 때 현지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새로 부임한 사단장급 이상 일선 지휘관들은 전날 육군 장교 구락부개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근무지에서 서울로 떠나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이 38도선에 20만 병력과 최신무기의 집결을 끝마치고 마지막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우리나라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은 연회에 참석하여 새벽까지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사이에 취하여 깊이 잠들어 38도선의 지휘계통은 먹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우리 국군측 초기 대응작전은 마비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한국 육군의 편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단 (지역)

사단장(지휘관)

예속 연대

보직일

사단

독립 제 17연대

(옹진반도)

(연대장)

대령 백인엽 28

육군본부 직할 독립연대

1950.3.1

1사단(문산)

대령 백선엽 30

11, 12, 13연대

6포병대대, 공병대대

1950.4.22

6사단(원주)

대령 김종오 29

2,7, 19연대

16포병대대, 공병대대

1950.6.10

7사단(의정부)

준장 유재홍 29

1, 9, 25연대

8포병대대, 공병대대

1950.6.10

8사단(강릉)

대령 이성가 28

10, 21연대

18포병대대, 공병대대

1950.6.10

후방사단

2사단(대전)

준장 이형근 30

5, 16연대, 포병대대

1950.6.10

3사단(대구)

대령 유승령 59

22, 23연대, 보국대대,

포병대대

1950.4.22

5사단(광주)

소장 이응준 60

15, 20연대,

1독립대대, 포병대

1950.4.22

수도경비사단

대령 이종찬 34

3, 8, 18연대

1950.6.10

 

 

당시 일선인 38도선 부근에 있었던 국군 가운데 17연대는 육지와 격리된 옹진반도에, 1사단(11, 12, 13연대)은 서부인 고랑포-개성-연안-청단 정면에, 7사단(1, 0, 25연대)은 그 동쪽 동두천-포천 정면인 중서부에, 6사단(2, 7, 19연대)은 어론리-춘천-가평 정면의 중동부 산악지역에, 8사단(10, 21연대)은 동해안 지역에 각각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후방지구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각지에 분산 배치된 후방사단 가운데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 3, 8, 18연대와 독립 기갑 연대는 서울에 배치되었으며, 2사단(5, 16연대)은 청주, 대전 등지에, 3사단(22, 23연대)은 대구, 부산 지역에 그리고 5사단(15, 20연대)은 전주, 광주 등지에 각기 분산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3) 싸울 장병도 실탄도 없는 수도 방어 사단

(의정부 7사단, 2사단, 수도사단)

7사단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사단으로, 1연대는 동두천 전방, 9연대는 포천 전방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공병대대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충남 온양에 주둔하고 있던 제 2사단의 제 25연대는 615일까지 금오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수용시설을 확보하지 못한 관계로 적이 남침하는 순간까지도 계속 온양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의정부 7사단은 예비연대가 텅텅 빈 가운데 전쟁을 맞이하였습니다. 또한 1950624일 육본에서 전방 장병들을 휴가, 외출을 보내라고 해서 1연대와 9연대의 30%가 비어 7사단 장병은 4천 명뿐이었습니다.

북한은 남침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소련군사고문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완벽한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전야의 국군 방위태세는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최악의 상황 그 자체였습니다. 8개 사단 중에서 4개 사단만 전방에 배치하고 그나마도 절반 가까이가 휴가 및 외출 중이었고, 나머지 4개 사단은 후방 지역에서 공비소탕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군 방위태세가 최악의 상황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쟁 상황을 고려한 국가 차원의 통합방위 계획이나 이를 기초로 한 국가 차원의 동원 및 전쟁 연습이 정부 수립 이후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전쟁 불과 1개월 전에 단행된 군 수뇌부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이동, 주요 지휘관의 교육 파견, 전쟁 전야 지휘관 및 참모들의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회식 및 부대별 평균 3분의 1에 달하는 장병들의 외출외박휴가 조치, 그리고 38선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전방 사단 연대급 부대에 대한 전후방 교체는, 개전 초기 단계에서 신속히 조치되어야 될 가장 중요한 사항들을 지연시키거나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셋째, 국군의 기동과 통신 장비에 대한 입고 조치, 탄약 및 모든 물자 보급 지원이 너무도 빈약하였습니다. 막강한 전차를 앞세우고 각 전선에서 물밀듯이 내려오는 적의 공격에 국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포를 맞고 꿈쩍도 않는 적의 탱크 앞에 일선부대는 차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육탄으로 전차위에 뛰어올라 수류탄으로 전차를 파괴하는 일을 시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넷째, 어렵게 수집한 이북의 남침 정보가 수없이 보고되어 정확한 대북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적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치 못하고 안일하게 대처한 군 수뇌부의 판단 능력은 문제 중의 문제였습니다.

 

(4) 군 내부의 안일한 모습, 남한 사회의 사치와 방종

북측은 무력 남침을 위해 약 18개월에 걸쳐 철저하게 준비했으나, 우리나라는 625일 당일까지도 휴일을 즐기고, 흥청망청하며 국방(國防)에 주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국군들이 교육훈련에는 소홍하고 사치와 낭비가 너무 심했고 미국 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여서 사교 댄스나 즐기는 형편이어서, 군인이 부패했다는 국민들의 비판이 자자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쪽에서는 호시탐탐 남침만 노리고 있는데, 남쪽에서는 사회가 타락하고 공의가 땅에 떨어져 뒤로 힘을 쓰는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아랫 사람들은 상관에 대하여 아부하는 것을 밥 먹듯 하면서 상사의 눈과 귀를 멀게 했기 때문에,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북쪽의 칼 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북한이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해 옴으로써, 전방에서 많은 사람이 피 흘리고 싸우며 죽어가고 피난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 부산 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향락에 빠져 있었다니, 국민들의 정신 상태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인민유격대 등을 통해 힘을 차근차근 기르면서 칼을 갈고 있었는데, 남쪽은 평화의 허상에 사로잡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대한민국 상황은 625전쟁 직전의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5) 군사력에서 북한군에 절대 열세였던 남한군

북한군은 625남침 전쟁 개시 직전까지 전투준비가 완료된 육군 총 10개 보병사단, 해군 3개 위수사령부(衛戍司令部), 공군 1개 비행사단이 주축이 된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남침 직전 3군 전체 병력은 201,050명으로, 국군 105,752명에 비해 약 두 배였습니다. 더구나 각 축선마다 북한군의 병력과 무기는 국군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곳은 북한의 주공 방향인 의정부-포천-서울 축선으로 남한군과 북한군의 병력 비율이 14.4였고, 개성-문산-서울 축선은 14.1였고, 양양-강릉 축선은 12.5로 국군이 북한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국군 38도선 경계부대의 전체 병력 중 3분의 1이 외출한 것을 고려한다면, 의정부-포천-서울 축선의 경우 실제 병력 비율은 17.1로 격차가 훨씬 심했습니다.

북한의 군사력은 부대 병력이나 주요 무기 면에서 남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당시 국군의 최대 화기였던 M-3105미리 곡사포는 구식으로서 최대사거리가 고작 6,500미터인 데 비하여 북한군의 주 무기인 122미리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1,700미터였으므로 그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의 포병은 한국군 포병의 사정권 밖에서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은 채 목표지점을 향하여 사격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북한군 보병사단은 국군 보병사단에는 없었던 120미리 박격포를 장비하고 있었으므로 산악지대에서도 공격부대에 대하여 위력이 큰 화력의 근접지원이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북한군은 남한군이 갖고 있지 않은 평사포 76.2미리를 24문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양적인 면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여 화포의 사거리가 1.5-2배가 넘었습니다.

 

야포 사거리표 비교

 

한국군

북한군

무기

사거리(m)

무기

사거리(m)

105mm 곡사포

6,525

122mm 곡사포

76.2mm 평사포

76.2mm 곡사포

76.2mm 곡사포

* 120mm 박격포

11,710

13,090

11,260

9,000

5,700

 

 

한국군은 적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북한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서울 점령을 위해 강과 산악 지형, 도로 등을 고려하여 개성-의정부-포천 축선에 전차의 대부분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습니다. 전쟁 직전 개성-의정부-포천 축선(1군단)에 배치된 전차 대수는 총150대였습니다. 203전차연대(-) 27대는 문산 지역의 1사단 지역에서 운용되었으며, 의정부-포천 지역에는 107전차연대, 109전차연대, 203전차연대 1개 대대, 123대가 배치되어 제 3사단 및 제 4단 지역에 투입되었습니다.

 

 

북한군 105전차여단 편성

107전차연대

109전차연대

203전차연대

기동화연대

206교도연대

208 SU-76대대

 

 

북한은 19506월 초 나남에서 T-34전차 30대로 독립전차연대를 창설하였고, 이후 약 90여 대의 전차로 제 16, 17전차여단 등 2개 여단을 추가로 창설하게 됩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625 남침 개시 직전까지 T-34전차 총 258대를 장비하였는데, 105전차여단에 150, 독립전차연대 30, 16전차여단과 17전차여단에 각각 44대였습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나는 전차 10대는 105전차여단의 206교도 연대에서 전환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군은 신속한 기동능력의 T-34전차 외에 막강한 화력을 지원하는 SU-76자주포를 176문이나 각 전선에 골고루 배치하였고, 2군단 쪽에는 603모터사이클 연대(모터사이클 560)라는 고속기동부대를 투입하여 이천-수원 방면으로 우회하여 수도 서울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국군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소총은 M1 계열의 ‘Garand'(개런드)’Carbine‘(칼빈)이었습니다. 이것은 2차 대전 때부터 사용되던 소총들에 비해 훨씬 무거웠으며, 근접전투나 저격용 소총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아군에게 가장 많이 보급되었던 칼빈 소총 역시 한반도의 혹독한 동계 기간에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장진호 전투에 대한 기록들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군의 병력이나 무기만으로는 불법으로 남침한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전쟁이 시작되고 단 하루만인 626일 새벽 4,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이사회가 열려 628, 해군, 공군을 통한 한국 지원요청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710일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유엔균 총사령관으로 공식 임명되었습니다.

 

 

4. 31개월 2일간 전쟁의 참화

(1) 1950625일 새벽 4시 전쟁 개시

1950‘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 가뭄이 닥쳤고, 아직 장마철이 아닌데도 619일부터 24일까지 연거푸 비가 내리다가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멎었습니다. 625일 새벽 3, 김일성(당시 38)은 내각 비상 회의를 열고 오늘 새벽 1시에 남조선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공화국을 침공하였다.”는 거짓말로, 전선 사령관 김책에게 “62504시 국방군을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폭풍!’이라는 공격 개시 암호명과 함께 전차를 앞세우고 강력한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38240km를 일제히 넘어 일방적으로 기습공격을 가해왔습니다.

그 순간 북한군 2사단이 122mm 곡사포를 터뜨리자, 꾸벅꾸벅 졸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정영삼 중위는 평소 박겨포 소리가 아닌 122mm 곡사포 소리에 놀라 상부에 보고하였으며, 날이 밝자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 2사단의 기계화 부대가 모진교를 통과, 38선을 돌파하였습니다.

62502 - 채병덕 참모총장은 갈월동 총장 공관에 도착하여 곯아 떨어졌다.

0510 - 춘천 7연대 임부택 연대장이 전화를 걸었으나, 부관 라엄광 중위가 참모총장이 잠을 잔다고 바꿔 주지 않았다.

06 - 육군본부 일직사령이 총장 공관으로 달려와 북한군의 전면 남침을 알리자 그제야 국장들 소집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참모회의를 하려고 해도 술에 취했던 국장들이 어디에 있는 지 연락이 되지 않아 참모회의를 할 수 없었다.

0730 - 국방부 장관에게 상황을 보고하였다.

0930 -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미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같이 의정부에 가서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상황 보고를 듣고서야 전면 남침을 확인하였다(전쟁 개시 5시간 30분 경과).

1010-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았다(전쟁 개시 6시간 10분 경과).

 

전쟁이 터진 것도 모르고 이승만 대통령(당시 75)은 아침부터 창경궁 비원 반도 연못에 한가히 낚시줄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625일 오전 1010,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이 남침한 사실을 보고 받고,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불러 큰소리로 나무라자, 그는 엉뚱하게도 , 오늘 새벽 4시에 38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대거 남침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일 이내로 평양을 향한 각하의 명령을 받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북한군의 침공으로 빚어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총참모장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한술 더 떴습니다. “적의 전면 남침이 아니라 붙잡힌 공비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한 책략 같으며, 남쪽의 부재를 즉시 출동시켜 반격하여 격파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전쟁의 상황을 아주 애매모호하게 보고 하였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전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으며, 국군 서부 지역 최전방 부대인 옹진반도의 제 17연대가 625일 당일에 무너지면서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의 후퇴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육본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은 17연대는 해주를 점령하고 38선 이북으로 20km를 북진하였다고 거짓방송을 하였습니다. 현재까지 좌파들은 이 방송을 근거로 국군이 북침하였고 625는 미국의 대리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군 1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때문에 해주를 점령할 수 없었고, 38선 이북으로 20km도 전진할 수가 없는 연대였습니다. 국군의 다른 부대들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인민군 전차 때문에 38선 이북으로 북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626일 신성모 국방부 장관도 중앙방송궁에 나가 침입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군은 총 반격전을 개시하였는 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전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생방송을 계속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남침 당일부터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모든 서울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오지 말고 집안에 머물러 있도록 강조했습니다.

 

정부는 피난민에 대한 비상계획이나 구호, 철수계획을 체계적으로 논의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데 분주하였습니다. 정부가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우왕좌앙하는 사이 동두천과 의정부 쪽에서는 적의 포격소리에 놀라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국민들이 보따리를 챙길 틈도 없이 허겁지겁 피난행령에 올랐습니다. 적의 압력이 가해질수록 서울은 이북 지역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에 의해 말할 수 없이 혼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청량리 거리는 피난민으로 꽉 메어져 있었는데도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전히 전황이 좋다고 하였으니, 서울 시민들은 남침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순간까지 정부의 방송을 철썩같이 믿고 피난가지 않은 자가 많았습니다. 급기야 628일 아침, 38선 접경지에 수도 서울에 이르는 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황상태였고,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무질서를 초래하여 주민들은 탈출로를 찾아 아우성쳤고 모든 거리는 사람들로 메워졌습니다.

 

(2) 개성-문산 전투

인민군의 개성 점령(25일 오전 930)

625일 새벽 4시 인민군의 포격이 일제히 시작되었습니다. 새벽 5,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14연대로 옹진을, 15연대로 개성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장갑차로 보이는 차량 3(북한군 전차)가 국군 검문소로 오는 것을 보고 정지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지한 전차는 헌병의 가슴을 벌집으로 만들고 헌병초소를 뭉개버린 후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였습니다.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특공대를 조직, 인민군에게 빼앗긴 개성시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병력 부족으로 적에게 밀려 철수하였으며 25일 오전, 개성은 인민군 6사단 15연대에 의해 안전히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국군 13연대의 승리(3대대, 1대대)

25일 아침 8, 대대 진지 앞 하곡동으로 인민군 전차 7대와 보병 1개 중대가 뒤따라 공격해왔습니다. 이에 고랑포 전방을 방어하던 국군 1사단 13연대 3대대 보병들은 인민군 보병을 공격하고, 중화기 부대는 인민군 전차를 전화력으로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재성 3대대장 9중대 1소대장 장두철 중위에게 특공대를 조직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하여 특공대 8명이 전차를 공격하였으나, 인민군의 집중 사격으로 전사하였습니다. 유 대대장은 특공대 7명을 다시 선발하여 북한군 전차를 집중 공격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25일 새벽, 자하리에서 훈련중이던 13연대 1대대는 인민군의 대포소리에 놀라 대대장 김진위 소령이 연대본부에 보고하고, 즉시 진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14연대 반란 후부터 최전방 부대가 아니면 실탄이 지급되지 않은데다, 훈련중이라 실탄이 전혀 없어 전멸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실탄을 지급받은 시간은 낮 12, 인민군 선두가 코앞에 다가오자 김진위 대대는 박격포와 105mm 곡사포 4문으로 포탄을 퍼부어 인민군을 고랑포 쪽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경, 인민군 전차가 선두가 되어 적성방면에서 금파리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김진위 대대장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8명에게 전차 한 대에 한 명씩 책임을 지워 박격포탄 2발과 TNT를 묶어 전차에 접근, 궤도에 던지도록 함으로써 인민군 전차 4대를 폭파시켰으나, 특공대원 4명이 전사하였으며, 나머지 인민군 전차는 적성방면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임진강교 폭파 실패

임진강교는 북한군의 서울 진입에 매우 중요한 통로였으므로, 북한군이 침입하면 의당히 폭파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공병대대장 장치은 소령은 문산이 위험하니 임진강교를 안전 할 때 폭파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이 임무를 공병 제 3중대장에게 부여했었는데, 25일 오후 정작 폭파해야할 중대한 시기에 그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대장은 할 수 없이 작전 장교에게 이 임무를 대행시켰는데,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으나 불발이었습니다. 작전 장교가 급한 마음에 다시 폭파병 두 명을 이끌고 뇌관을 연결, 폭파를 시도했으나, 양군의 포사격으로 도화선이 절단되어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끝내 임진강교를 완전히 폭파하지 못하고 철수함으로써 중공군 출신으로 구성된 막강한 전력의 북한군 제 6사단 주력부대가 임진강교와 철교를 건너 서울을 향해 물밀듯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문산 격전

62612연대장에 부임한 김점곤 중령은 개성에서 후퇴한 12연대 2대대 한순화 소령 부대를 이끌고 문산에 도착하였습니다. 1대대장 신형용 소령도 영산포로 철수하여 소수병력을 이끌고 문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문산에 도착하여 병력을 점검하니 3천 명이던 연대병력 중 2,4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남은 병력은 600여 명뿐이었는데, 이들은 문산 서쪽에 배치되어 인민군을 방어했습니다. 이들은 문산 서쪽에 배치되어 방어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26, 11연대 1대대 인민군이 임진교 동쪽 비인리를 공격해오자 11연대 2중대 김봉건 중위의 부대가 이를 잘 막아내었으나 인민군이 전차 11대를 앞세워 11연대 1대대를 공격해옴으로써 1대대는 더 이상 방어를 못하고 문산초등학교로 후퇴하였습니다. 11연대 2대대도 인민군 전차에 밀려 830분 문산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때 임진강교 폭파에 실해했던 공병대대는 22명의 자원특공대를 조직해 전원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유서를 쓴 뒤 문산 남쪽 도로변에 호를 파고 들어가 인민군 전차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품속에는 TNT묵음 속에 수류탄을 넣어 자폭용 폭탄이 들어 있었습니다. 전차가 나타나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그 속에 뛰어들겠다는 비장한 결의였습니다. 이들은 봉일천 전선으로 귀환한 후에 적의 포격을 뚫고 용감히 앞으로 나가 전차에 하나둘씩 뛰어들면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눈물겨운 노력으로 북한군은 봉일천의 방어선에 감히 다가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11연대는, 문산 북쪽의 인민군에 대해 역습을 실시하여 이들을 임진강 북쪽으로 격퇴하는 등 최선을 다하였으나,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됨에 따라 1사단은 한강을 건너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62711시경 인민군이 18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봉암리 쪽에서 위전리 쪽으로 공격해 오자, 15연대 3대대장 최병순 소령은 육탄공격조를 편성하여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적의 전차에 뛰어올라 6대를 파괴하였습니다. 이때 11중대장 이선도 대위를 비롯한 많은 대원들이 전차의 기관총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차 6대를 잃고 공격기세가 꺾인 북한군 6사단은 공격을 중단하고 문산 방향으로 후퇴하였습니다.

 

(3) 서울의 관문(동두천, 포천, 의정부 지역) 전투

북한군은 서해 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지상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적의 제 1차 공격 표적이 된 수도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의 주공부대인 제 1군단은 연천과 운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축선과 개성에서 문산에 이르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춘천, 강릉을 목표로 한 조공부대인 제 2군단은 화천-춘천 접근로에 중점을 두고 화천과 인제, 양양 일대에서 춘천과 홍천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자주포(SU-76)를 앞세우고 일거에 국군의 38선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

 

인민군 최대 군사력이 집중된 서울의 관문(동두천, 포천, 의정부)

인민군은 서울 북방 의정부 방면을 공격하기 위해 3사단, 4사단, 105전차여단 등 총 37,000명의 병력과 T-34전차 123, SU-76 자주포 80대 등 최대 군사력(30%)으로 총집중하였습니다. 무적의 괴물 T-34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나 자주포도 갖지 못했고,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 무기도, 그에 대한 적절한 방어 훈련도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국군은 처음 보는 전차와 괴물 같은 그 위력을 보고 겁에 질리고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은 당시 T-34전차의 위력을 실감나게 합니다.

탱크라는 건 알지만 얼마나 무서운지 그땐 몰랐던 거여, 대가리가 돌아가는 것도 몰랐어 우리는. 거기다 대고 쏘라는 거지, 쇳덩이에다가 기관총을 쏘라는 거야. 그러니까 딱 서. 서니까 저거 망가진 줄 알았지, 우리는. 그런데 대가리가 뺑 돌더니 우리 있는 대로 쾅 쏘니 뭐. 기관총이 훌쩍 날아가지.- 김형필(당시 일등중사. 1931년생)

이건 뭐 전차만 나타났다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 사기가 죽어가지고...- 박형수(당시 중위. 1930년생)

 

동두천, 포천 지역에는 국군 제 7사단(유재흥 사단장)38선 경계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동두천 정면에는 제 1연대(함준호 연대장), 포천 정면에는 제 9연대(윤춘근 연대장)가 배치되어 있었고 사단 예비대는 없었습니다. 의정부 7사단의 예비연대 제 25연대는 610일부터 갑작스런 부대 이동 명령으로 온양에서 이동 명령을 받고 아직 의정부에 도착하지 전이었으므로, 남한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를 방어해야 할 7사단은 예비연대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624일 오후 휴가와 외출을 나가 부대 안에 있는 7사단 장병은 겨우 4,000여 명이었습니다.

625, 7사단 방어지역을 공격한 북한군은 제 105전차여단의 지원을 받는 2개 정예 사단으로, 그 중 제 3사단이 포천 방향으로, 4사단은 동두천 방향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625일 아침 5157사단 작전참모 이연규 중령이 약수동에 살고 있는 유재흥 7사단장에게 인민군의 남침 소식을 전하자 유재흥 사단장은 30분 만에 의정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인민군의 대포공격으로 1연대 6중대장 최춘정 중위와 3중대장 안태섭 중위가 전사했을 때였고, 9연대 대전차 포대장 허헌 대위가 포대원을 이끌고 포천 위 만세교에서 인민군 전차를 저지하다가 포대원 전원이 전사하였습니다.

만세교 코앞에 닥친 인민군 전차부대를 보고 9연대 2대대장 전순기 소령은 일단 2대대를 신북면사무소 근처 탄장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고 전차에 놀란 장병들은 포천으로 도망쳤습니다.

새벽 430분 급보를 받은 윤춘근 9연대장이 포천 현장으로 가려고 대원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켰으나, 이동할 차량이 5대 밖에 없어 병력을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 일찍이라 차량 징발이 어려운 가운데 헌병이 겨우 차량 12대를 징발하여 930분에야 포천에 도착하였습니다. 3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시간이나 지체한 것입니다. 윤춘근 연대장은 포천에서 인민군 전차부대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38교에서 만세교까지 전차를 막을 수 있는 전차 함정이나 전차벽이나 교량 폭파준비나 어느 것 하나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에 실패하였습니다. 또한 8포병대대의 105mm 곡사포 15문은 위급한 시기에 탄약이 없어 쓸모없는 무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인민군 3사단은 11시에 포천을 점령하였습니다.

적의 기갑부대는 국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한 후 11:00경에 포천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포천 남쪽에 포진한 제 5야전포병대대 진지를 유린하였습니다. 이때 연락장교편으로 지금 제 3연대가 포천으로 출동 중이니 이와 협조하여 탄장(炭場)선에서 적을 저지 격멸토로 하라.” 는 사단의 구두명령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이미 예비진지까지 적에게 피탈된 데다 사단과의 통신도 연대장 재량으로 광릉으로 철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625일 오전 10, 수도사단 18연대는 동두천에서, 3연대는 포천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하라는 육본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서울에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 3연대(연대장 이상근 중령)는 비상발령 후 제 7사단에 배속명령을 받고 소집된 600여 명의 병력으로 2개 대대를 혼성편성하여 연대장이 도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 3대대장(김봉익 소령) 지휘 하에 주둔지인 서빙고를 떠나 포천으로 향하였습니다.

7사단의 동측 제 9연대를 증원하는 임무를 띤 제 3연대가 15:00경 포천 남쪽 송우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포천 읍내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합류한 연대장은 제 7사단 사령부에서 확인한 불확실한 적정과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포천 부근의 상황을 종합판단한 끝에 송우리에 방어진지를 급편하기로 결심하고 태봉산과 그 남쪽에 2개 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3연대의 방어진지 편성이 미처 끝나기도 전인 17:00경 전차 7-8대를 선두로 하여 자주포, 장갑차, 차량 등 150대로 이루어진 적의 대기갑주대가 접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맞아 장비가 열세한 제 3연대는 81mm 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화력을 집중하고 57mm2.36대전차포로 전차를 공격하며 싸웠으나 적의 전차 1대만을 도로변 배수로에 빠지게 하였을 뿐, 적의 포격과 기총사격에 완전 압도되어 저항을 거의 포기한 상태로 빠져 들었습니다. 이처럼 다급한 상황 아래서 연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앖았습니다. 더 이상 방어진지를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 3대대장은 연대장을 대신하여 철수명령을 하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전 초일에 국군 제 7사단은 동두천과 포천 및 송우리까지 피탈당하여 부대의 전력이 분산되어 의정부 방어가 위태로운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민군 3사단은 송우리를 점령하였고, 인민군 4사단은 이 날 해질 무렵 동두천 시내에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개전 초에 포천과 동두천을 적에게 점령당함으로써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에 육군본부는 의정부 방어를 위해 서울 부근 주둔 부대(7사단 잔여병력과 수도경비사령부 사단 예하 18연대)와 후방에 있는 부대(대전의 제 2사단, 대구의 제 3사단, 광주의 제5사단)까지 축차적(逐次的)으로 투입하여 역습을 꾀했으나, 전차로 중무장한 인민군의 공세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26일 오전, 국군 제 7사단은 역습을 감행한 결과 동두천을 탈환하는 듯하였으나, 후방이 포위될 위협 때문에 철수하였고 국군 제 2사단(16연대, 5연대)도 전적차로 인해 포천 공격이 실패하므로 분산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차갑준 소령이 지휘하는 5연대 2대대는 축석령에 도착했으나, 실탄 보급이 늦어져 전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용채 16연대장은 휴가병과 외출병을 끌어모아 겨우 혼성 1개 대대를 편성하여 26일 새벽 4시 창동역에 도착하였으나 트럭이 없어 3시간을 걸어 아침 7시에 금오리에 도착하였고, 이때 실탄이 없어 후퇴하는 5연대를 만났습니다. 이에 몬용채 연대장은 장병들에게 금오리에서 자일리 사이 동쪽 산으로 올라가 개인호를 파게 하였습니다. 626일 아침 8, 자일리 쪽에서 금오리 쪽으로 인민군이 장사진을 이루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포병 학교 제 2교도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105mm 곡사포로 1번 전차만 집중적으로 공격 파괴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인민군 후미 전차가 전진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때 후미 전차 한 대가 포신을 돌려 전차포를 쏘아 김풍익 소령과 제 2연대장 장세풍 대위 및 포대원 전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렇게 626일 단 하루 만에 국군 2사단, 7사단, 수도사단 합 3개 사단이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개전 3일째 627일 새벽 4, 포천과 동두천을 확보한 인민군은 의정부를 공격, 627일 의정부 방어선이 붕괴되고, 이어서 창동 방어선마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개전 초기, 북한군이 앞세우고 내려오는 전차와 자주포를 멈추게 할 효과적인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소부대의 초급지휘자()들 중에는 필사적인 육탄 공격으로 적의 진입을 막다가 산화(散花)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병사들,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들은 특공대와 결사대를 조직하여 박격포탄 및 수류탄 뭉치와 화염병을 손에 들고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를 공격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파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38선 전역에서 적게는 몇 명에서부터 많게는 십수명으로 구성된 특공대, 결사대 등이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의 활약과 희생으로 축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이 확보될 수 있었고, 병력과 화력 면에서 절대 열세에 있었던 전선 상황도 부분적으로나마 만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초급지휘자()들이 몸으로 보여 준 전투는 가히 희생적이고 결사적이었으며, 나라를 멸망의 위기로부터 구한 위대한 구국적 행동이었습니다.

 

서울 사수의 마지막 저지선인 미아리 청량리 방어선은, 대체로 27일 밤중에 무너졌습니다.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한 지 불과 60여 시간 만에 수도 서울에 T-34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왔습니다. 국군은 탱크를 파괴할 만한 단 한 대의 대전차무기도 갖기 못하여 계속 밀리다가, 미아리가 뚫리고 적의 탱크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울에 맨 처음 돌입한 북한군 부대는 105전차여단이권무이끄는 제 4사단의 제 18연대였으며, 18연대는 그 본부를 덕수궁에 두었습니다. 이어 이영호가 이끄는 제 3사단이 입성하였으며, 방호산의 제 6사단은 서울로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73일에는 인천을 점령하였습니다.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서울 시내에 제일 먼저 돌입한 제 4, 3사단에게 715서울사단이라는 명예칭호를 부여하였고, 105전차여단에도 사단 승격과 동시에 서울사단의 명예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한강교의 조기 폭파(1950628일 새벽 230)

북한군이 침공한지 4일째 1950628일 새벽 230, 한강의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었습니다. 당시 한강에는 5개의 교량(이촌동-노량진간의 한강대교와 3개의 철교, 광나루의 광진교)이 있었으며, 수도권 내에서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모두 이 교량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북한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공격을 막으려면 한강교의 폭파가 필수적인 조치였습니다. 문제는 그 시기인데, 한강교의 폭파는 그 시기의 잘못으로 피해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큰소리는 쳤으나,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한 채병덕 총참모장은 626일 의정부 전선이 붕괴하여 창동선으로 후퇴할 무렵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 1사단 공병이 임진강교 폭파에 실패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필요시에 한강교 폭파는 자신이 있는가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이때부터 한강교 폭파계획과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정시간은 627일 오후 4, 공병감은 27일 오전 11시경 공병학교 폭파교관(황원회, 이창복 중위)을 불러 한강교 폭파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날 오후 3시까지 폭파준비를 완료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명령 즉시 폭파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한강교 폭파 준비는 27일 오후 330분경에 준비가 완료되었으나, 육군본부가 시흥에 내려갔다가 다시 서울로 복귀하는 바람에 원래 오후 4시에 예정된 폭파시간도 지연되었습니다.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은 공병학교장에게 총참모장과 나, 그리고 공병감의 명령이 있을 때만 한강교를 폭파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공병감은 전세가 호전되어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뇌관과 도화선을 거두어 대기하도록 폭파조에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아리 방어선에 적의 공격이 심해지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27일 밤 1130분 다시 폭파준비를 명령하고, 28일 새벽 145분경 돈암동에서 돌아온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교 폭파 명령을 내리고, 그길로 장경근 국방부 차관과 육본은 떠났습니다.

한강교 폭파계획에 대해 들은 미 고문단 참모부장 그린우드 대령은 부대가 한강교를 건너고 보급품 및 장비 등이 후송될 때까지 연기해야지 한강교를 폭파하면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한강교 폭파를 연기해 주시오! 미군의 보급품이 인민군의 손에 다 넘어가면 큰일입니다.”라고하며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백일 참모부장은 상부의 명령이라며 그 간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준장 이형근 2사단장도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국군의 중화기와 장비가 철수하지 않았는데 한강교를 폭파해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미아리 지구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도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1선 병력이 후퇴 명령이 없어 그대로 있는데, 국군의 주력부대와 중화기를 철수시키지 않고 국군의 퇴로를 차단해서 포로가 되게 하는 작전이 어디 있는가? 한강교를 폭파해서 국군을 다 죽일 작정인가? 중화기와 군 장비와 군수품을 몽땅 인민군에게 바치려는 것인가?”라고 항의하자,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잘못하면 오해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김백일 참모부장은 후퇴명령을 내리고 장창국 작전국장에게 즉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국군 주력이 통과될 때까지 폭파를 중지하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장창국 작전국장은 정래혁 중령, 공국진 중령, 류근창 대위, 박정인 중위과 같이 지프차를 타고 한강교 폭파현장으로 달렸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시영 부통령 차가 한강교를 지나가 조금 지연된데다가 삼각지 입구부터 한강교까지는 수만 명의 피난민이 도로를 꽉 메웠고, 인파에 떠밀려서 움직이는 상황이라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장창국 일행이 남한강 파출소를 150m 남겨두고 있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이 들렸습니다.

628일 새벽 2,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엄홍섭 중령과 황원회 중위에게 다리 위의 피난민을 제지하고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시영 부통령이 지나가자 헌병이 손전등을 켠 손을 번쩍 들어 불을 붙이라고 표시하였습니다. 황원회 중위가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628일 새벽 230,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폭음 소리와 함께 한강교가 폭파되어 내려앉았습니다. 다리 위의 차량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그 일대는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타올랐고, 사람들은 붕 떴다가 강물 위에 떨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은 다리 밑 바닥을 허우적 거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그 참상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습니다. 당시 다리 위에 있던 약 800-1,000여 명이 한꺼번에 강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강북에 고립된 6개 사단(1사단, 5사단, 7사단, 수도사단, 2사단, 3사단) 44,000명의 병력은 전사하거나 지휘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실종 됐으며, 중장비를 비롯한 개인화기까지도 고스란히 버리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의정부 쪽에서 혈전을 벌이던 7사단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헤엄을 쳐 겨우 500명의 장병이 기관총 4정만이 가지고 한강을 건넜습니다.

한강교가 폭파된 줄도 모르고 봉일천에서 역습을 시도하고 있던 백선엽 1사단장은 눈물을 머금고 부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민군이 행주에 오기 전에 한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철수를 서둘렀습니다. 한강교가 끊긴 이후 살 수 있는 가망성이 희박해지자 후퇴하는 혼잡한 틈에 1사단 내에 있던 좌익 세력의 이상한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13연대 본부중대장 박구준 중위가 본주중대원들을 이끌고 철수하려고 집합!이라고 외치자, 장병 세 명이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집합이냐라고 항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 중대장은 그 세 사람이 빨갱이가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권총으로 사살하고, 전 중대원들을 즉시 집합시켜 행주나루에 모이게 했습니다. 또한 13연대 3대대장 유재성 소령이 한강을 건너려고 밤새 걸어서 29일 새벽 불광동 근방에 도착하였을 때, 부대를 점검해보니 10, 11, 12 3개 중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추격하여 살펴보니 5사단 작전참모 오예택 소령이 국군 계급장을 떼고는 장병들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유 소령은 권총을 빼들고 오 소령을 사살하였고, 13연대는 필사적으로 29일 새벽 한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행주나루에 이산포는 국군 1사단과 의정부 7사단 병력들로 대 혼잡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는 어선 30척뿐이었습니다. 절망하여 자살하는 장병이 있는가 하면 서울로 가는 장병, 사복으로 갈아 입고 숨는 장병, 무기를 버리고 벌거벗고 수영하여 한강을 건너는 장병 등 후퇴명령을 받지 못했던 장병들이 한강교가 끊긴 상황에서 겪은 그 초조함과 절망감,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상병들을 가득 실은 버스와 트럭이 행주나루터에 도착, 저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으나 저들을 건너게 해 줄 대책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국군 1사단의 전쟁 개시 이후 4일 동안 피해는 전사자가 장교 37, 사병 284, 실종자가 장교 45, 사병 587명이었는데, 한강을 건너면서 당한 피해는 장교 81, 사병 2,435명 등 총 3,469명으로 4일간의 전쟁 때보다 훨씬 더 많이 희생되어 1사단이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도 한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장병들은 4일간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해 눈뜰 기운도 없었으며, 소총도 없이 속옷차림에 맨발이었으니 거지 중에 상거지였습니다. 인민군은 이러한 국군 패잔병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김포비행장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한강교 폭파의 영향은 심각하여 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음성녹음만을 남기고 야간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 서울 방어를 장담하던 군 수뇌부의 철수, 갑작스런 한강교의 폭파는 정부와 군의 커다란 허점을 드러내었고, 정부에 대한 신뢰와 그 권위는 완전히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군 수뇌부는 민심 수습을 위해 한강교 폭파와 관련된 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고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된 후 14년이 지난 1964년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최대령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뿐이라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에서 그 상관이 누구인지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문제에 있어서, 군 내부 지휘책임과 군 내부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한강교의 조기 폭파는, 적의 진출로를 차단하는 목적보다 오히려 우리측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정부가 서울 사수를 약속하는 바람에 피난을 가지 않거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이 허다했으며, 한강교를 폭파하는 순간부터 150만여 명의 서울 시민들은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인민군은 동작동, 흑석동, 노량진을 점령한 후 한강 폭파 시에 잘려지지 않은 하행선 철로 위에 목재를 깔고 전차가 지나갈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73일 새벽 4, 인민군 4사단은 목판을 깐 철로 위로 전차 4대를 건너게 하는 데 성공, 이후 인민군 전차는 계속 한강을 건넜습니다. 73일 오후 3시 영등포에 인민군 전차가 도착하자, 오류동, 소사, 부천 근방에서 인민군의 남진을 막고 있던 국군 혼성수도사단, 2사단, 7사단은 일제히 수원 쪽으로 후퇴하였습니다.

 

628, 서울대병원 국군 부상병을 집단학살한 인민군의 만행

7사단, 2사단, 5사단, 3사단, 수도사단 패잔병들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628일 아침, 마침내 북한군이 미아리를 뚫고 중앙청을 지나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습니다. 개전 직후 의정부 지구에서 부상한 국군 부상병들은 모두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심한 부상을 입은 중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서울대 병원을 점령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들은 우선 병원문을 닫고 병원 사방에 보초를 세운 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였습니다. 국군 부상병들을 침대에서 끌어내려 모두 죽이고, 병실마다 차례차례 들어가 원수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 있다.’라며 선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따발총을 난사 학살하였고, 결국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100명 이상의 국군 부상자가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인민군은 국군 부상자뿐 아니라 일반 환자까지도 악질반동이라고 하면서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총소리와 비명소리에 놀란 각 병동의 환자들은 무조건 도망하려고 마음을 조이며 대피하였으나, 인민군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병실, 복도, 수술실, 변소, 식당 등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뒤쫓아 기어이 찾아내고는 잡히는 대로 즉결처분하였습니다. 이렇게 28일 낮 현재, 각 병실에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쓰러진 인원은 약 5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인민군은 병원을 점령한 지 2시간도 못 되어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인민군은 환자들을 병실에서 죽이면 인민군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 곤란하고 또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환자들을 병원 밖으로 끌어내어 담벼락이나 나무 밑에 줄줄이 세워 놓고는 한꺼번에 총을 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환자들을 병원 밖으로 끌어 내었습니다. 오후 1시쯤에는 모든 환자들을 현재의 의대 뒤(당시에는 무료진료소)에 집합시켰습니다. 이 시간에 모여진 인원은 대략 300여 명이었습니다. 파리한 모습에 구부정한 몸가짐을 한 환자들에게 북한 공산군은 발포 명령도 따로 없이 가까이 있는 환자부터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아 헐떡이는 환자들에게는 총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개머리판으로 난타하는가 하면 발길로 목을 짓눌러 죽이는 참혹상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더 잔인한 살인마는 큰 돌을 번쩍 올려 머리에 던져 죽음을 재촉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부상병이 시체더미 속에 살아 남아 숨을 헐떡이자, 이를 본 인민군은 트럭 2대를 가져와 시체더미 위를 서너 번 깔아뭉개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병원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던 1개 소대(30, 소대장 남소위), 1개 중대(200)가 넘는 인민군과 교전 끝에 소대장 이하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여 부상병들과 운명을 같이하였습니다.

인민군의 병원 내 학살 만행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까지 숨어 있다가 적발된 이들은 본보기로 보일러실로 끌어가 석탄 저장소에 끌려가 생매장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습니다. 석탄더미는 5m가량 되었는데, 인민군은 환자들을 눕힌 다음 그 위에 석탄을 퍼부었습니다. 환자들은 이내 석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붉은 사상을 가진 의사와 직원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러한 만행은 바로 그들이 앞장섰던 결과였습니다.

 

당시 증언자들에 의하면 한낮에 시체더미를 대로에 끄집어내었을 때 시체 썩는 악취는 인근 동네에까지 가득하여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7월 중순에는 인민군이 그 시체를 노상에다 쌓아놓고 휘발유를 부어 불을 질러서 시체 타는 냄새로 고역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이름 모를 자유 전사의 비라는 현충탑이 가로 세로 3 × 5m 크기의 시멘트에 흰 칠을 한 평범한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1950628.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국군 부상병들을 죽이고 민간인 환자들을 죽인 이 사건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분명한 전쟁범죄입니다. 1949812, 제네바 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제네바 협약 중 전지(戰地)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12조를 보면 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성별 인종 국적 종교 정견(政見)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하여 차별하는 일 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받아야 하고,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합니다.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고문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제네바 협정은 비록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적 윤리는 지키자는, 인간이 야수가 아님을 나타내는 마지노선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민군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의사와 간호사들은, 제네바 협정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동이 불가능한 부상병들과 환자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니 한 사람을 두 번씩 죽인 셈입니다. 그렇게 서울대 부속병원에서는 약 1천 명이 넘는 환자 부상병 애국지사 등이 희생되었습니다. 참으로 이같이 비인도적인 전례는 아직 세계 전사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1950628일에 있었던 서울대 병원 대학살 만행을 통해 우리는 짐승보다 못한 공산당의 정체를 똑바로 그리고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서울 점령 이후 인민군의 3일 지체

서울은 북한군에 의하여 장악되자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북한군은 곧 마포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각 경찰서에 들어가 정치범은 물론 죄수들을 모조리 석방시켰습니다(남로당원 약 9,000). 이들은 인민의 영웅으로 추켜져 북한군을 환영하는 선봉에 내세워졌고, 이른바 반민족주의자들의 색출에 앞장서게 하였습니다. 서울을 수복한 928일까지 공산치하 3개월 동안 입은 인명피해는, 전국적으로 165,000명이 학살되고, 122,000명이 북으로 납치되었습니다. 서울에서만 민간인 9,500명이 피살되었고, 4,200명이 북으로 끌려가는 참상을 겪어야 했습니다.

북한 공산당은 창경원 앞과 혜화동 로터리 두 군데서 자신들이 잔인하게 살해한 시체들을 태웠습니다. 창경원 앞에서는 시체를 쌓아 놓은 뒤 불을 질렀는데 좀처럼 타지 않자 어디서 가져왔는지 석유를 뿌리고 태웠습니다. 그 불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이것을 지켜보는 인근 주민들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공산당의 정체가 바로 저것이구나 하는 것을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승리에 들떠 군 수뇌부는 2일간에 걸쳐 서울시청에서 승전 축하연회를 여는 등 일방적인 공격을 멈추고 3일간 서울에서 지체하였습니다. 북한군이 3일간이나 서울에서 지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헌영에 의해 은밀히 공작된 약 6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남한 전역에서 일제 봉기하면 남한 전체를 순식간에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단 공격을 개시한 후 서울을 단시일 안에 점령하면 남한 각 지역의 남로당 세력들이 총 봉기하게 될 것이므로 한강선 이남 지역이 거의 무혈로 점령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 남쪽에서 폭동이 일어나기를 바랬던 북한측 지도자들의 속셈은, 북한군은 남한을 침략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남조선 해방투쟁을 협력하려고 서울에 내려온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빌미로 미군은 한국의 내전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여, 저들의 남침 계획에 큰 걸림돌인 미군 개입을 초반에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스탈린도 인민군은 서울에서 봉기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한강을 건너지 말라.”라고 하여 남한에서 일어날 민중폭동을 기다렸습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세 이승엽 동무가 서울시 인민위원장으로 부임하면 즉시 봉기가 일어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라고 하면서 안심시켰습니다. 이에 박헌영이 이승엽에게 매일 몇 차례씩 독촉을 했는데도 폭동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남로당 간부 김삼룡, 이주하, 이재복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인민유격대 2천여 명이 국군 진압부대에 의해 토벌되었으며, 남로당 서울시당 홍민표의 자수 이후, 그가 설득한 남로당원 약 33만 명이 자수하여 폭동을 일으킬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일을 기다려도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자 71, 김일성은 초조하여 인민군에게 한강을 건너 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북한군 제 1사단, 3사단, 4사단, 6사단 등 4개 사단은 일제히 한강을 건넜습니다. 인민군 전차의 평균 전진 속도(시속 20km)로 간다 할 때 아무리 늦어도 710일쯤이면 부산과 목포까지도 점령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국군은 대전 3사단, 광주 5사단, 대구 3사단이 국군 1사단, 7사단, 수도사단과 함께 한강 이북에서 괴멸되었기 때문에 이제 한강 이남에서 인민군을 막을 병력은 강릉 8사단, 원주 6사단, 대구 3사단 23연대뿐이었습니다. 3일 만에 국군 병력 98,000명 중 44,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54,000명만 남은 것입니다. 이는 인민군 대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4) 춘천 홍천 지역 전투

6사단 정면으로 공격해 온 북한군 제 2군단은, 예하 제 2사단이 화천에서 춘천 방향으로, 12사단이 인제에서 홍천 방향으로 각각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춘천, 홍천 지역 전투는 주로 춘천 정면과 홍천 북방, 두 곳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대한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국군 제 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7연대를 춘천에, 2연대를 홍천 및 현리 북방에 배치하였고(620), 19연대는 예빌 사단 사령부와 같이 원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57mm 대전차포 중대 제 2소대장(심일 중위), 인민군의 자주포(SU-76)를 아무리 공격해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육탄공격을 결심하여 소대원 5명을 차출하였습니다. 결사적인 각오로 심일 중위 등 5명은 적의 자주포에 육탄으로 돌격하여 화염병과 폭탄을 이용해 인민군의 SU-76 자주포 2문을 파괴하였습니다.

그 직후 갑자기 적의 포격이 164고지 일대와 춘천시내에 집중되었습니다. 적은 38도선을 쉽게 돌파한 후, 아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여 춘천을 단숨에 탈취할 수 있다고 속단하고 역골-소양교간 6km에 달하는 개활지를 밀집대형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이처럼 위태로운 국면에서 지원포병인 제 16야전 포병대대는 직접 조준사격으로 적과 맞서 필사적으로 포격을 집중하였으며, 곧이어 57mm 대전차포 3문이 이에 가세하였습니다. 적은 선두 돌격제대가 격멸되면 다시 후속제대를 투입하는 파상공격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무 한 그루 없는 전답 지대에서 완전 노출된 상태로 무조건 정면공격만을 감행하였기 때문에 막대한 출혈이 있었으나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격 당일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명령의 이행을 위하여 우선 소양강 도하발판을 확보하려고 죽음을 무릅쓰는 듯하였습니다. 7연대의 노력으로 인민군 2사단의 ‘25일 안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산되었고 소양강 도하도 못한 채 발이 묶였습니다.

같은 시각 홍천에서는 북방을 방어하던 2연대 1대대가 즉시 비상을 걸고 중화기 중대를 북상시켜 인제군 남면 어론리 585고지에서 방어하였습니다. 함병선 2연대장의 명령으로, 강승호 소위는 특공대 20명을 조직하여 바주카포 10문으로 S자 길에서 숨어 기다렸다가 선두 자주포(SU-76)의 궤도를 공격했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자주포까지도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최초 인민군 제 2군단의 목표는 빠른 시간 안에 춘천을 점령하고 다음에 수원 방면으로 진출하여 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으나, 차질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춘천 축선의 공격력을 증강하고자 홍천 방면으로 공격중인 제 12사단에서 2개 연대를 차출하여 소양강 상류의 원평리와 부창리로 우회하여 진출시켰습니다.

27일 새벽 5, 인민군은 소양강 돌파를 위해 증강된 4개 연대로 국군을 압박해 왔습니다. 7연대가 적과 격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6사단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김백일 대령)을 통해 서부전선이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도록 이상!”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7연대를 춘천에서 철수시킨 후 국사봉-안마산-대룡산 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628일 정오까지 원창고개에 신방어 진지를 편성하였습니다. 결국 7연대는 원창고개에 2대대를 배치하고, 연대 주력은 퇴로차단을 막기 위해 홍천 북쪽 시현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인민군은 춘천과 홍천에서의 작전 실패로 인해 인민군 제 2군단장 김광협은 2군단 참모장으로 강등되었고 김무정이 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2사단은 이청송 소장이 해임되고 최현 소장이 임명되었습니다.

 

춘천, 홍천 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 6사단이 인민군의 공격에 맞서 춘천을 3일간 고수함으로써, 인민군 제 2군단에 의한 한강 이남에서의 포위를 막았고 731일까지 6일간 한강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미 제 24사단의 한국 도착 및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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