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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3. 여수 14연대-반란(순천사건)(4)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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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빨치산 토벌 작전

The operation to suppress North Korean partisans

 

(1) 호남 ·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의 빨치산 토벌 작전

(194931194944)

구례 기습 작전에서 실퍃나 김지회 부대는 지리산으로 퇴각하여 입산 후 전술을 장기항전으로 바꾸고 병력을 분산시켰습니다. 즉 일부는 백운산에 근거지를 정하였고, 일부는 태석봉, 둔철산, 정수산, 감악산 일대에, 나머지는 달궁, 장안산, 덕유산, 천마산, 칠봉, 삼도봉을 연하여 유격 근거지를 형성하였습니다.

반란군들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함양, 진주, 하동 등지에 출몰하여 관공서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라도와 경남 일부 지역에 불안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들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육본에서는 194931일에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의 병력을 강화하여, 사령관으로 원용덕(元容德) 준장과 정일권(丁一權) 준장을 각각 임명하였습니다. 이들은 공비의 도로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이들은 공비의 출몰을 엄중히 경계하면서 각처에 포위망을 펴고 그들이 섬멸될 정도로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비들도 이에 굴하지 않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각 지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아군에게 산발적인 공격을 거듭하였습니다.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반란군 소탕작전을 3단계로 구분하여 실시했습니다.

1단계 작전 : 사령부는 3월 초순 작전부대를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산청 지역에 분산 배치하고 1주일에 걸쳐 수색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산악 지역의 추위를 피하거나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야산 지대로 하산한 반란군들을 지리산으로 쫓아 올리는데 목적을 두고, 야산 주변의 수색작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단계 작전기간 중에는 소규모의 접전밖에 없었지만 화개장전투에서 제 9연대 제 3대대가 김지회 부대로부터 기습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2단계 작전 : 311일부터 전개한 작전으로, 야산지대에 산재한 반란군들을 지리산 일대로 몰아넣은 다음 격멸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전부대는 노고단·반야봉·천왕봉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맥의 남과 북을 순차적으로 이동하면서 반란군의 은거지를 집중 수색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공비들은 지대내의 근거지를 버리고 분산하여 함양·안의·거창 지역으로 도주하였습니다. 토벌부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북상하였으나 접촉하지 못한 채 작전을 종결짓고 말았습니다.

 

3단계 작전 : 316일부터 실시된 진압 부대는 거창·함양 등지로 이동하여 반란군은 색출 소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지리산 북동쪽 40km 지점의 거창에 거점을 둔 제 3연대 제 3대대(대대장 한웅진 대위)는 매일같이 산청·안의·위천 방면에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을 반복하였습니다.

한편 토벌작전 기간 중 북한이 38선 부근에서 직·간접적으로 견제공세를 취했기 때문에, 국군은 이에 대비하여 토벌부대를 대거전방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지리산 부근을 거점으로 유동하던 생존 공비들은 두목 김지회, 홍순석 지휘 하에 1949321, 지리산으로부터 총병력 500명을 덕유산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북상지서에서는 갑자기 많은 병력이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즉각 전투태세를 갖춘 후 사격을 가하였으나 그대로 도주하였습니다.

이에 북상지서 남쪽 위천지서로 목표를 바꾸어 이동하였고, 위천지서에 도착한 공비두목 홍순석은 우리들은 덕유산에서 반란군을 소탕하고 거창으로 돌아가는 국군 제 3연대의 병력이다. 반란군의 출몰이 심한데 지서의 경비태세가 매우 소홀하다.”하면서 지서근무 경찰관들을 전원 집합시켜 무장을 해제하고 숙직실에 감금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홍순석은 거창 경찰서장에서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명령조로 전달하였습니다. “우리는 국군 제 3연대의 선발대인데 지금 덕유산의 반란군 토벌을 마치고 거창으로 이동중이다. 현재 우리는 위천 지서에 있는데 주력부대 500명이 거창에 갈 터이니 식사와 숙소를 1시간 안으로 준비하고, 또 차량 8대를 징발하여 20분 내로 위천에 보내라. 그리고 차량인솔은 경찰서장이 직접 하라.”

거창 경찰서 사찰주임 유봉순 경위는 대대본부에 가서 통화내용을 알려주고 위천 지서에 있는 부대의 정체 확인을 요청하였습니다. 한웅진 대대장이 작전을 마치고 거창 경찰서에 돌아와 위천지서에 전화를 걸었을 때 반란군 지휘관 홍순석이 받았는데, 그는 제 3대대장에게 너희들은 반란군이 아니냐? 우리는 제 3연대의 토벌부대다. 너희들의 소속은 어디냐?”라고 되물으면서 오히려 토벌부대를 반란군으로 몰아붙였습니다. 한웅진 대위는 우리가 제 3연대 장병들이다. 너희들의 소속을 확실히 대라.”고 하니까, 홍순석은 그때서야 우리는 구례에 있는 제 12연대다. 1시간 후에 거창에 가겠으니 거기서 이야기하자.”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이때 대대장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공비들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대대장은 고작 10km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위천에 공비가 출현한 상황을 확인하고서도, 그 당시 거창 제 3대대 본부에는 본부경비병력밖에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긴 하였으나, 만일의 경우 거창을 공비가 습격할 것에 대비하여 거창 경찰서장과 협조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하였습니다.

대대장이 중대병력과 함께 위천 지서에 도착했을 때, 납치되어 가던 위천 지서장이 도중에서 탈출하여 위천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토벌부대는 다시 차량행군을 시작하여 북상 지서에 당도하였지만 이때에도 공비들은 북상 지서에 방화하고 떠나버린 후였습니다. 토벌부대는 단념하지 않고 8km 정도 진출하여 월성리(황점 동쪽 3km)에서 공비들이 버리고 간 트럭 2대를 발견하였습니다. 대대장은 토벌부대 장병들을 격려하면서 계속 전진하다가 우마차에 약탈품을 싣고 가는 10여 명의 공비를 발견, 사살하고 수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생포한 공비를 심문한 결과, 김지회, 홍순석 일당 500여 명이 덕유산에 입산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위천 지서에서 전화한 자가 바로 홍순석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습니다. 3연대 제 3대대가 마침내 공비의 두목 김지회와 홍순석의 행적을 포착한 것입니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는 공비들이 거창 북방과 덕유산을 근거지로 준동하게 되자, 예하 전 병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군·경 협동으로 덕유산을 포위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포위작전에는 제 3연대 제 1대대, 3대대, 5연대 제 3대대, 9연대 제 3대대, 그리고 독립 제 1대대(일명 서울유격대)5개 대대 외에 경찰부대가 참가하였습니다. 328일 밤, 분산되어 있던 각 대대와 경찰부대는 함양에 집결하여 다음날 밤 덕유산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습니다. 330, 정일권 전투사령관은 작전부대를 진두지휘하여 포위망을 좁혀가기 시작하였습니다.

44, 토벌부대는 괘관산을 포위 압축하여 천정동에서 반란군의 숙영지에 박격포를 동원해 공격을 가했으며, 다음날에도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 반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전투에서 지휘 체계가 무너질 만큼 큰 타격을 받은 반란군들은, 이후부터 중대대대 단위의 작전행동을 하지 않고 소규모 병력으로 흩어져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괘관산 전투(194944)에서 큰 성과를 거둔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김지회, 홍순석 일당이 지리산으로 잠입하였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계속 추적해 섬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48, 3연대 제 3대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김갑순 상사는 대원 2명을 대동하고 산내면 반선리에 들어가 이 마을 주막 여주인에게 화장품을 선물로 주면서 이곳이 공비들의 통로이니 그들이 오면 술도 주고 밥도 주면서 가능하면 그들을 재운 다음 입석리 대대 본부로 알려주기 바란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다음날 03:00, 반선리 부락 청년단장이 뛰어와서 지금 공비 30명이 술과 밥을 요구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3대대장은 본부요원 60명을 트럭 2대에 분승시키고 6km 떨어진 현장으로 급히 출동하였습니다. 공비들은 차량이 달리는 소리를 듣고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출동부대는 이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였습니다. 마침 달빛이 환하여 사격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대대는 이반선리 전투에서 공비두목 홍순석과 정치부장·후방부장 등 17명을 사살하고 문화부장을 위시한 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홍순석은 농구화에다 토끼가죽으로 만든 잠바를 입고 있었으며, 자신의 인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의 신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13, 달궁부락에서 김지회의 처 조경순을 체포하였는데, 조경순이 김지회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진술하자 김 상사는 그가 어느 골짜기에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반선리 인근 골짜기에 까마귀 떼가 몰려 있는 곳에서 시체 1구를 발견하였습니다. 부패하여 인상착의를 분별하기가 곤란했으나 조경순에게 확인시킨 바 김지회가 틀림없었습니다.

육국본부에서는 토벌작전에 공로가 큰 제 3연대 제 3대대장 한웅진 대위 이하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광을 주었고, 정보과 김갑순 상사에게는 100만 원의 상금과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2) · 경 합동 지리산 지구 토벌 작전(1949919502)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관 정일권 준장은 김지회 일당을 섬멸한 후 1949418일 서울로 복귀하고, 3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동지구사령관에 임명되어 계속 잔당의 토벌작전에 임하였습니다.

 

빨치산 공비들의 활동이 격화되자 1949922일에는 김효석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고나, 장경근 내무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정일권 참모부장, 이호 치안국장 등 군경수뇌가 내무 장관실에서 회합하여 군경합동으로 대대적인 지리산 지구 토벌작전을 단행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949928일 지휘권을 인수받은 김백일 대령이 잔당들을 거의 섬멸함으로써, 1950125일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고 195025일에는 호남 일대에 선포되었던 계엄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작전 단계를 수립, 조직적인 토벌전을 전개하였습니다.

 

1단계(기본공작기) : 19491030일부터 1130일까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장안산-덕유산-백아산-회문산-입암산 일대의 공비 근거지를 포위하여 확보하고, 제반 정보를 수집하여 계몽 선전 공작을 강화하고, 민간인의 의견을 청취하여 국민 조직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대민 공작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단계(전투공세기) : 1949121일부터 1215일까지 강력한 군경합동 섬멸작전을 단행하였습니다.

 

3단계 : 19491216일부터 1950228일까지 건설공작 및 농촌 재건 촉진, 사상 선도, 민심 수습에 치중하고 이재민에 대한 적극적인 원호 사업과 사상 선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때 공비가 나타난 횟수는 총 556, 나타난 공비 인원은 12,366, 기간 중의 총 전과는 공비 사살 365, 생포 187, 귀순 4,964, 아지트 파괴 168개소 등 선무 공작(宣撫 工作)은 큰성과를 거두었습니다.

 

(3) 빨치산 소탕을 위한 국군 11사단 창설

(195010195146)

1950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9,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단행된 한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에 의해 전선이 급속하게 북으로 이동됨에 따라, 퇴로가 막히는 바람에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 부대와 패잔병들이 대량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되었으나, 많은 수의 인민군이 각 지역의 산악 지대로 잠적하여 그 곳에서 지방 공비들과 합세하였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비정규전을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지역 교란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은 호남 지역과 경북 내륙 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병참선 차단, 식량 약탈,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군이 1950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습니다. 지리산이나 태백산맥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의 활동은, 유엔군의 병참선을 계속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유엔군은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으로, 게릴라의 활동을 억제하고 치안 유지와 주요 병참선 경계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195010월 빨치산 소탕을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였습니다. 11사단은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만한 모든 곳을 제거한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통해 토벌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견벽청야는 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국군 11사단은 1950104일부터 실시한 공비토벌 임무를 195146일 국군 제 8사단에 인계한 후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180일 동안 전개한 작전에서, 호남지구 공비의 조직적인 활동을 분쇄하였습니다.

 

(4)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한 3개 사령부 신설(19515)

계속된 토벌작전으로 빨치산의 활동이 둔화되긴 하였으나, 국군은 19515, 3개의 사령부를 신설하여 주요 병참선의 경계와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경북 영주)

- 서남지역 전투사령부(전북 장원리)

- 북부지역 전투사령부(강원 원주)

 

(5) 백야전사령부(백선엽 야전전투사령부, Task Force Paik)(19511126)

8월 말경 유엔군의 하계 공세가 한창일 때, 북한 게릴라의 남부군단의 주력(무장공비 766, 비무장공비 3,076명으로 추산됨)이 태백산 지구에서 지리산 지구로 남하한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본래부터 잔류하고 있던 지리산·백운산 유격대와 남원·구례·산청군 공산당원들을 흡수하여 활동을 개시함으로써 9월 말부터 10월에 걸쳐 지리산 주변에서는 살인·방화·약탈·납치 등이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북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는 후방 교란을 전략적으로 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시림으로 뒤덮인 지리산은 빨치산들에게 알맞은 은신처였으며, 기후도 한국에서는 제일 따뜻하고 또한 곡창지대여서 의식주 해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공비토벌사에 기록된 그 당시의 살인·방화·약탈·납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3일에는 북한 제 57사단 소속 약 3백여 명의 게릴라가 백주에 내대리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모아 놓고 추수한 곡물의 대부분을 약탈하여 도주하였습니다.

1129일에는 하동 북방의 악양면을 3일간 점령하고 주민 천여명을 동원하여 식량을 지리산으로 운반해 갔습니다. 힘들어 수확한 1년 분의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소나 돼지 등 가축과 논두렁 밭두렁에 씨를 뿌려 거둔 콩까지 약탈해 갔습니다.

이 같은 사건과 아울러 남부군 창설(19515월 중순) 소식에 위기감을 느낀 유엔군 사령부는, 19511126일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사령부를 남원에 설치하여, 군인과 경찰 합동으로 대대적인 동계 토벌작전을 벌였습니다.

- 백야전 사령관 : 소장 백선엽

- 수도사단 : 준장 송요찬

- 8사단 : 준장 최영희

-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 준장 김용배

 

1기 작전 : 1951128일부터 15일까지 지리산 일대를 집중 공격하였습

니다.

2기 작전 : 19511219일부터 195216일까지 전남·전북을 나누어

집중적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3기 작전 : 195219일부터 31일까지 지리산 소탕자전을 전개하였습니

.

4기 작전 : 195224일부터 27일까지 지리산과 인근 지역에 대한 소통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백야전전투사령부가 발표한 전과 결과는 사살 5,009, 생포 3,968, 귀순 45, 은거지 파괴는 341개소입니다. 이 작전을 거친 후, 남한 빨치산은 195110월 현재 6,911명에서 19524월 현재 2,070명으로 대폭 감소하였습니다. 이때 빨치산은 큰 타격을 받아 대부분 사살되거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여 자수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당시 빨치산 중에는 수많은 양민이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것입니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자들 중에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빨치산의 뒤를 따라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현재 지리산 뱀사골 입구의 빨치산토벌 전적 기념관 자리에는 지리산 전적기념비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충혼(忠魂)’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빨치산과 토벌부대에 관련한 전시공간이 뱀사골 탐방안내소 2층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리산지구 전적비에는 충혼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 삼남의 지붕에 공산비적이 반거하게 된 것은

 

1950년 낙동강 선까지 남침했던 북괴군이

우리의 총 반격에 다시 쫓기어 가게 되자,

그 일부 지방 공비와 합류하여 이곳에 숨어들게 됨으로 부터이다.

당시 이들 적도의 세는 2만에 달하였는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하여 도량하되, 그 지역이 동으로는 의령,

서로는 고창, 남으로는 보성, 북으로는 금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양민의 학살과 납치, 재물의 약탈과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니,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적기가 나부끼는

양상이 되었다. 이에, 그해 말부터 이곳 남원을 중심으로,

국군 6개 사단과 2개 독립 연대,

그리고 6개 독립 대대 및 전투 경찰 4개 연대와 7개 독립 대대,

그리고 11개 경찰서의 의용 경찰과 대한청년단 특공대 등이

힘을 모아 이들을 함께 무찔러, 1952년을 고비로 그 세를 꺾고,

1954년에는 조직의 뿌리를 잘라 드디어 이를 초멸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그 때 이 평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더라면 어찌

오늘 이곳 곡창에서 격양가가 메아리칠 수 있었겠는가?

다시금 고개 숙여 그 날의 충혼을 기린다.

19781230

 

일찍이 공산비적의 무리가 삼남의 지붕을 어지럽히던 날,

국군과 전투 경찰이 멸공의 횃불을 여기에 밝혀

적도를 토멸하였고, 이 고장 이름 없는 애국 향인이

신명을 함께 바쳐 향토를 지켰으니,

여기는 대유격전의 효시가 된 곳이요,

향토수호의 의지가 뭉쳐 빛난 곳이다.

그 날의 증인으로 이 돌을 세우니,

세월은 멀어지되 새겨진 얼은 새로우리라.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돌비에서

 

 

8. 14연대 반란 주동자들의 최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The end of the ringleaders of the 14th regiment uprisings

(Kim Ji-hoe, Hong Soon-seok, Ji Chang-soo)

 

(1) 14연대 반란 주동자, 김지회 중위(육사 3, 군번 10505)

이북에서 계획적으로 훈련시켜 남파한 간첩

김지회는 1925323일생으로, 그의 본적은 함남 함주 삼평면 삼태리 137번지이며 함흥 농업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김지회는 이남의 군 내부 반란을 목적으로 이북에서 계획적으로 훈련시켜 남파한 간첩이었습니다(194611). 김지회는 1947113, 함흥중학교 선배이자 국방경비대 내에서 북로당 프락치 총책이었던 이병주의 도움으로 무난히 육사에 제 3기생으로 입학, 동년 419일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4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광주 4연대에서는 작전 및 정보장교였으며, 194861일 여수 14연대로 전속된 뒤 중위로 진급하였습니다.

제주 4.3사건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주도의 제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피살되자(19486웅러 18), 연대 내의 좌익 인사에 대한 숙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여수 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은 김지회 중위가 좌익 주요 인물임을 통보받고 상부에 그의 구속을 건의하였습니다. 이런 내막을 안 김지회와 지창수 등 좌익세력들은, 자신들을 대한 감시가 더욱 강화되어 숙청과 구속이 임박해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리산 도망자들에 대한 김지회의 잔인한 공개 처형

이후 김지회는 19481019일 여수 14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순천을 빠져 나와 광양과 백운산, 구례를 거쳐 반란군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구례는 지리적으로 반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곡성·광양·순천·보성·남원 등과 연결되는 길목으로, 구례에서 활동하던 좌익인사 등 구례 주민 일부가 김지회 부대와 함께 입산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여수 14연대(1대대 1중대 2소대 소속)의 사병으로 있다가 반란 주동자들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반란에 가담하게 되었던 서형수씨는 그 당시의 일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김지회 부대와 함께 지리산으로 붙잡혀 들어가, 그가 겪었던 두 달간(11-12월 한겨울)의 산 속 생활은, 하루하루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과의 싸움이었고 비참한 그 자체였습니다. 빨치산 부대가 토벌군과 교전을 거듭하는 동안에 전사자는 늘어나고 산 중 추위 때문에 도망병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김지회라는 인물의 살기등등한 만행에 치를 떨었습니다. 당시 지리산에는 한겨울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죽는 자가 많았고,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자가 수두룩했습니다. 김지회 부대와 산 생활을 함께하면서 자주 목격한 것은 산에서 몰래 도망치다가 붙잡힌 자들의 공개 처형이었습니다. 김지회는 총알이 아깝다며 잡힌 그 자리에서 날카로운 칼로 목을 베어 한 명이고 열 명이고 공개적으로 아주 잔인하게 죽였으니, 그의 만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공개 처형은, 산 속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 도망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공포심을 자극시켜 붙잡아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언제나 살기가 서려있던 매서운 눈과 그의 무자비한 잔인성 때문에 도망치려 했던 자들도 김지회만 떴다 하면 겁이 질려 절로 발길을 멈출 정도였다고 합니다.

 

 

반선리 전투에서 김지회 사살(194949)

여수 순천 사건이 있은 지 약 5개월이 지난 194949일 새벽 230분쯤, 김지회·홍순석 일당 40여 명은 산내면 반선리 선술집을 찾아왔습니다. 술집 아주머니는 사복을 입고 찾아왔던 3대대 정보과 김갑순 상사로부터 밤에 군복을 입고 오는 자들이 있으면 술을 많이 먹이고 부엌에 호롱불을 켜 주세요라고 부탁받은 것을 기억하고, 김지회 일당이 찾아왔을 때 식사 전에 막걸리를 많이 주어 먹게 한 후 부엌에 호롱불을 켰습니다.

한웅진 대대장(3연대 3대대)은 부엌에 호롱불이 켜졌다는 반선마을 청년단장의 연락을 받은 후, 즉시 대대병력을 이끌고 6km 떨어진 현장으로 달려가, 이미 자동차 소리에 놀라 도망가기 시작하는 김지회 일당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습니다. 이때 홍순석을 비롯한 정치부장, 후방부장 등 17명이 사살되었고, 7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전투 후 4일 만에 시신 발견(413, 덕동리 달궁 마을)

생포된 공비들이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도 같이 있었다고 진술하였지만 부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4일이 지난 413, 3연대 3대대 정보과 선임하사 김갑순 일등상사는 반선리에서 5km 남서쪽으로 떨어져 지리산에 더 가까운 덕동리 달궁마을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여자 한 명을 포함한 수명의 공비 일당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김갑순 상사는 두 명의 대원과 경찰 두 명을 대동하여 달궁 마을에 잠복해 있다가 김지회의 처 조경순을 비롯한 일당을 생포하였습니다. 조경순을 심문하여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하자 그녀는 반선리 전투 후 김지회와 헤어져 그를 찾아 다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김갑순 상사는 반선리 주민들을 모아놓고 최근에 까마귀 떼가 모여드는 곳이 없었느냐?”라고 물었는데, 한 사람이 연정(連井) 마을 골짜기에 그런 곳이 있다고 알려주어 그 일대를 수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정마을은 지리산 뱀사골 입구로, 현재 지리산 파크텔 뒤쪽으로 추정됩니다. 마침 반선리와 인근 골짜기에 까마귀 떼가 몰려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에 수색대는 금방을 샅샅이 뒤져 반선리 주막집에서 600m 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습니다. 김지회는 반선리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창가 밖으로 나오는 등 그 시체가 너무 훼손이 심하여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남원의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에 갇혀 있던 조경순에게 김지회의 신체 특징을 물어보았는데, 화개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어 등 쪽에 흉터가 있다고 하여 사체의 등에서 총상의 흔적을 발견하고 김지회의 시신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김지회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 처 조경순에게 직접 확인케 했는데, 조경순은 그를 알아보고 얼굴을 돌리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지회는 배에 총상을 입고 창자가 밖으로 빠져나오는데도 600m이상을 도망치다가 골짜기에 쓰러져 까마귀의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나이 25세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군경을 죽인 그가 여순반란을 일으킨 지 약 5개월 20일 만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한편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제주도 조천면, 1930621일생)은 그의 부친이 목사였으며, 제주도 지리를 잘 알아 김달삼에게 이재복의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병 역할을 했습니다. 김지회를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그녀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다녀 언론에서는 빨간 스웨터의 공비 여두목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동광신문 19481123일자에는 조경순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곤색 원피스를 입고 권총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는 역도(逆徒) 김지회의 애인. 그는 어느 누구일까? 소란한 세상에 화젯거리를 던지고 있고, 지금은 지리산 상산봉 찬비 내리는 곳에서 오직 운명을 원망코 한탄하며 역도의 위안물, 노리개가 되어 있다는 철모른 여인을 모종 단서를 얻어 찾아보기로 한다. 즉 본적을 제주도 조천면 1618번지에 두고 호적상으로는 서기 1930621일생 금년 19세의 처녀인 조경순이라는 자가 장본이다. ... 조경순과의 양성소 동기생 김() 모양이 수줍은 어조로 전하는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역도 김지회가 제주도 경순이의 집에까지 찾아가서 경순이의 아버지에게 경순이와 결혼하겠다고 구혼한 사실도 있었는데 경순이의 아버지는 목사이였기에 기독교인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거절한 사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8월 중순경 나의 책상 위에 사표를 제출하여 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광주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동기생 친구들은 김지회와 경순이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으나 경순이가 이렇게 불쌍하게 될지는 몰랐다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조경순은 19499월 이용운 및 김태준 등과 함께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검찰관 김근배 대위는 피고들의 반국가적 이적행위는 국방경비법 제 32조에 위배됨을 지적하고 각각 총살형을 형하였습니다(동아일보 · 서울신문 1939930일자, 1949101일자).

 

 

(2) 14연대 반란 주동자, 홍순석 중위(육사 3, 군번 10583)

홍순석(洪淳錫)1922216일생으로, 당시에는 홍창표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의 본적은 서울 중구 길야정(吉野町) 일정목(一丁目) 121번지이며, 중국 연길현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 길현으로 가서 만주군 중사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지회 중위와 마찬가지로 1947419일 소위로 임관, 광주 4연대에 배속되었다가 동년 315일 중위로 진급하여, 194861일 여수 14연대로 배속되었습니다.

19481019, 제주도 지역에 토벌대로 투입될 예정이었던 여수 14연대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선동으로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지창수 상사는 당시 군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악감정을 자극하여 제주도 출동 거부’, ‘남북통일에 헌신하는 인민해방군이 되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당시 여수 14연대에는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에 의해 남로당에 가입한 좌익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치밀하게 반란을 준비해 온 저들은 가장 먼저 대대장부터 하사급까지 군 지휘관들을 모두 총살하여 죽이고 무기고를 점령하였습니다. 나머지 사병들은 지휘관이 사라지자 무기를 소지한 반란군 일당들에게 순식간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수 시내로 진격해 들어가자 여수 시내에 있던 6백여 명의 좌익 세력이 곧바로 동조하여 관공서를 비롯한 주요 기관들을 파괴했습니다.

1020일 오전 9시경, 여수를 완전히 장악한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국기를 게양한 뒤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열어 양민과 우익 청년과 그 가족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곧바로 약 2개 대대의 반란부대는 순천으로 올라갔습니다. 순천에는 반란을 일으킨 제 14연대의 2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선임중대장으로 남로당원인 홍순석 중위는 2개 중대를 통합 지휘하면서 북상하는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3시경, 그들은 합류하여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였으며 반란군은 병력을 3개 부대로 재편성해 주력 1천여 명이 구례, 곡성, 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화순 방면으로, 나머지는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 하동 방향으로 나누어 흩어졌습니다. 남원, 구례, 보성 등지에서는 반란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방 좌익세력들이 점령하여 14연대 반란군이 무혈입성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028, 국군은 여순반란군을 진압하였고, 112일 대구 6연대가 반란 진압 차 출동했다가 일으킨 반란 역시 곧 진압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남로당 조직은 완전히 노골적인 전면 투쟁으로 전환하였고, 김지회와 홍순석 지휘부를 중심으로 근거지를 모두 산악 지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리하여 대체로 5개의 유격전구가 형성 되었는데, 지리산유격전구 호남유격전구 태백산유격전구 영남유격전구 제주도 유격전구 등입니다. 이들 가운데 지리산유격전구가 총본산이었는데, 남으로는 백운산, 북으로는 덕유산을 잇는 전남-경남-전북의 산악지대에 걸쳐 있었고, 경남과 전남북의 많은 중소도시들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두목은 남로당의 거물 이현상(李鉉相)이었습니다.

 

김지회와 함께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들을 이끈 지도자 홍순석은 194949, 한웅진 대대장이 이끄는 3연대 3대대와의 반선리 전투에서 김지회와 함께 사살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홍순석은 농구화에 토끼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홍순석이라고 한문으로 새겨진 도장이 있어 신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3급을 수여받았습니다. 한편 홍순석, 김지회 사살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던 반선리 주막 여주인은, 그 후 빨치산 잔당의 습격을 받고 돌에 짓이겨진 채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차참한 모습으로 살해당했고, 주막집도 불태워졌습니다.

 

(3) 14연대 반란 주동자, 안사계 지창수 상사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 최초 주동자는 인사계의 자창수(池昌洙) 상사였습니다. 지창수 상사는 전남 벌교 출신으로,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을 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제 말기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했습니다. 그는 8.15 해방 직후 박헌영의 전남 지역 심복들 중의 한 명인 김백동(전남 보성군 벌교 출신)의 눈에 들어 그의 하수인으로 활동하다가, 당의 지령에 따라 국방경비대 광주 4연대의 사병 1기로 입대하여 좌파 사병들의 비밀군사동맹(일명 병사소비에트) 총책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일제 말기 지원병으로 복무한 군사경력 때문에 동기들보다 진급이 빨라 입대한 지 1년 몇 개월 만에 1등 상사로 진급, 4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사실 그는 정치적 뒷 배경이 막강하여 장교로 입대할 수도 있었으나, 전남북 지역과 제주도 지역 군부 내의 공산당 조직을 한손에 장악하려는 그의 상사 김백동의 계획에 따라 일부러 사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지창수는 14연대 반란 이후 그의 행적이 모호하나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음 같은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안재성 이현상 평전(296)

194811, 지창수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가 이현상 부대와 합류하여 빨치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19491월 중순, 경남 하동군의 칠불암 뒷산을 정찰하다가 매복중인 토벌대에 의해 지창수가 생포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한편 지창수의 집안은 광주의 유명한 부호였었고, 그 재력에 의해서 지창수가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506.25전쟁 초기 인민군이 남하할 때 다른 죄수들과 함께 집단으로 감옥에서 처형되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안도섭 세월이 가면(143-145)

2차 구례 기습작전에 참가한 지창수 부대는 섬진강을 건너 구례읍 서남부에서 포위망을 이루며 구례읍으로 들이 닥쳤습니다. 김지회, 홍순석 부대는 구례읍 동북부로부터 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구례읍에 주둔한 제 12연대 2개 대대의 저항과 반격으로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서야 했습니다. 19491, 칠불암 뒷 능선을 정찰 중이던 지창수의 소조가 토벌군의 매복에 걸려 지휘자인 그 자신이 생포돼 버렸습니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일단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으며, 6.25 초국군 후퇴시 처단되었습니다.

 

안성일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302)

반란 주모자 지창수는 19491월 중순경 생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당시 광주의 유지인 지()씨 집안에서 구명운동을 벌여 무기징역으로 감행되었으나 6.25 초 국군 후퇴 시에 처형되었습니다.

 

이선교 6.25 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130)

그는 194810월 말경 반란을 일으킨 지 약 10일 만에 김종갑 소령이 지휘하는 6연대 3대대의 벌교 반란군 소탕 때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393-395)

지창수 부대는 이 구례작전 때 주력과 합류,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지리산에 들어간 지창수는 이른바 금싸라기 같은 지하당간부동지들을 적지에 내팽개치고 온 행위에 대해 이현상으로부터 당적 책벌을 받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9492월 부상을 입고 국군토벌대에 생포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록이 정확한 역사적 기록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가 194810월 말부터 19506.25전쟁 초기 사이에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반국가적인 반란 행위와 수많은 양민을 무고하게 죽인 댓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9. 남북 노동당 대남 공작 최고 책임자들의 최후

The end of the highest-ranking leaders of the Workers Party of north and South Korea who led the North Korean espionage operations in the South

 

남로당과 북로당의 대남 공작의 최고 책임자들의 피검을 계기로 그처럼 기고만장하면서 온갖 허위, 모략, 파괴, 살상을 거듭하여 오던 좌익 계열은 남한에서 모조리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1) 이재복(남로당 군사부 총책)

해주에 있는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이남에서 진행되는 모든 폭동을 주동한 자가 바로 이재복이었습니다. 이재복은 남로당 특별공작 책임자 및 군 내부 공산화 공작의 최고 책임자로, 대구 10.1폭동, 제주 4.3폭동, 여수 14연대 반란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재복(1903년 생, 당시 45)은 이유업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본적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597번지입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다시 교토 신학대학을 졸업, 1943년 평양 출신 길공주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길공주는 미션학교 평양 숭의여고를 거쳐 평양신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교토 산파학교를 다니다가 이재복을 만난 것입니다. 8.15해방을 맞아 아내와 함께 귀국한 이재복은 목사, 길공주는 전도사로 영천 읍내의 중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이재복은 여운형 계통에 있다가 좌익 계통인 인민당에 입당, 경북도 인민위원회의 보안부장을 거쳐 박헌영의 신임을 받아, 당시 군사부장이었던 이중업이 이북으로 도망간 사이 공석이었던 군사부장의 자리를 맡게 됩니다.

이재복은 대구 10.1폭동 이후,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 후에는 지하로 잠적하여, 이후로 제주 4.3폭동, 여수 14연대 반란까지 주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491218일 오전 3시경 제 1연대 정보관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 377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재복은 이근민(李根民), 박영근(朴永根), 오일서(吳一緖), 이일도(李一道) 등 네 개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경향신문 1949119일자).

 

국가보안법에 의해 체포된 그는 김창룡 대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일주일간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김창룡은 이재복이 전직 목사인 점을 감안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 남한 내의 교회들이 살아나는 길은 바로 당신이 남로당원들 명단을 넘겨주는 일이다라고 설득하자 그제야 500명이 넘는 남로당원 명단을 넘겨 주었다고 합니다. 이재복이 마지막으로 숨어 있다가 잡힌 곳은 그의 셋째 부인 집이었습니다. 당시 남로당 고위급 간부들은 자기들의 은신처 확보를 위해 본부인 말고도 둘째, 셋째 부인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무대 김창룡이 마지막에 이재복에게 전향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자기가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고 하면서 끝내 전향을 거부하여, 1949526일 최남근과 함께 수색에서 총살당했습니다(경향신문 1949528일자).

 

(2) 이중업(남로당 중앙조직부 총책)

이중업은 1928년 서울 경복중학을 졸업하고, 1933년 성균관대 법과 3년 당시 성균관대사건으로 5년 복역 후 박헌영과 손을 잡고 좌익운동을 하다가 해방 이후는 건준위원으로도 활약하였습니다.

본명 이중업(38)은 이중영(李重英) 또는 김창선(金昌善)이라는 두 개의 가명을 가졌으며 박헌영 콤그룹 하의 주요 인물로, 박헌영의 월북 후 남로당 중앙조직부 책임자로 남로당 20개 전문부화 산하 23개 단체를 지도하며 남한 각 군단위로 정보를 수집하여 박헌영에게 전했습니다. 한편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산하에 특수 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강화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남로당특수부 책임자 이재복에게 지령하여 여수순천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동아일보 1949410일자).

남로당 중앙당조직부 총책임자 이중업은 남한을 무대로 온갖 모략으로 우익계열의 요인암살과 테러, 방화 그리고 여수순천 사건을 야기하여 동족살상 유혈의 참극을 배후에서 조정하였습니다. 1949225일 새벽 4시경 홍제동에서 체포되었는데, 당시 이중업은 말하기를 나는 신실한 공산주의자였다. 체포 전까지 나는 결사적으로 봉사하려는 의사가 충분하였으나, 체포 후 지금에 이르러 과거에 걸어온 노선의 이론과 실천에 있어 정반비례함을 깨닫고 비법성과 독재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남로당의 전 기밀을 세상에 폭로하여 민족이 원하는 공산주의 말살을 하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동아일보 1949410일자 2).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했습니다.

이중업은 형무소에 수감중에 19497, 김수임이 시킨 군 프락치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 이후 이북으로부터 월북하라는 지령을 받은 194910월까지 김수임의 집 2층에 머물렀습니다. 김수임은 개성(開城)에 있는 자기 어머니가 위독하여 곧 가봐야 겠다는 허위구실을 만들어 자기가 근무하는 미국대사관의 자동차 한 대를 빌려 가지고 이중업을 의사로, 최만용을 조수로 가장하여 무사히 38선을 뚫고 중범 이중업을 월북시킨 후 자신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그가 탄 지프차에는 미국대사관의 표식이 달려 있었던 데다 앞자리에 앉은 이중업은 머리를 노랗게 물을 들였던 터라 외국인처럼 보여 오고 가는 데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습니다(경향신문 195628일자).

 

(3) 이강국(남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은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거쳐 독일에서 베를린 대학 법학부를 나온 천재로, 풍채로 좋고 지식과 인격을 겸비한 소위 지식인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한 바 있던 그는 비교적 시야가 넓고 또한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능숙하여 박헌영의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이강국은 위조 지폐 사건 때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애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습니다. 김수임이 19469월 박헌영과 이강국에 대해 미군의 체포령에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아내 그 두 사람을 북으로 탈출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결국 월북한 뒤 북조선 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거쳐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초대 외무부상(外務副相)으로 있다가 다시 조선상사회사(朝鮮商事會社)” 사장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6.25전쟁이 끝난 후 195383일부터 6일까지 이어진 평양의 최고재판소 특별군사재판에서 미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그토록 충성했던 김일성의 손에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박헌영, 이승엽, 이강국, 이현상, 한설야, 임화 등 북한 공산당 지배층을 이루던 여러 파벌 중에서 연안파와 함께 최고 지식인 집단이었던 이들 남로당 계열은 싹쓸이로 제거되었습니다.

 

(4) 국제여간첩 김수임(이강국의 애인)

김수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1세 때에 남의 집 민며느리로 있다가 그 집에서 나와, 어느 선교사의 도움으로 늦게야 여학교를 마치고, 계속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 세브란스병원 영어 통역사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이 따를 수 없는 천재적인 사교술을 지녔고, 영어에 능숙한 데다가 그 기질 또한 서구적이어서 당시 수사기관의 최고 고문으로 있던 미국고관(베어드)의 사랑을 받아 동거 중에 있었습니다. 당시 김수임의 기세는 매우 당당하여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화 한 번에 파면선고가 내려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환경은 좌익활동을 마음 놓고 전개하는 데 지극히 유리했기 때문에, 무너져가는 남로당의 마지막 등불처럼 이용을 당하게 됩니다. 김수임은 어느 파티에서 우연한 기회에 이강국과 알게 되었는데, 서로 호감을 가지고 만나는 가운데 연인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강국은 월북한 이후에도 대남공작을 계획하면서 김수임을 적극 이용할 목적으로, 머지않아 자기들이 중심이 되는 통일정부가 수립된다는 것과 자기는 옛 애정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그녀와 결혼할 날을 기다린다고 유혹하였습니다. 능숙한 수법을 써서 계속해서 자기를 위해서 일을 해주어야 한다.’는 감언이설로 김수임을 다시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강국을 사모하고 동경하던 김수임은 당장에 자기 집을 남로당 중앙간부 아지트로 사용할 것을 승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강국의 지령을 받아 탈출 사형수 이중업을 그녀의 집 2층에 두게 하였습니다. 베어드에게는 친척이라고 속였으며, 그는 그 말을 의심 없이 믿고 한 집에 사는 가족으로 서로 환담하는 사이까지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이후 1950년대 남로당 잔당은 정치모략 공작에 주력하였는데, 당시 군경의 수사 계획이 재빠르게 진행되어도 남로당원들이 먼저 알아차려 실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기밀 누설의 근원지는 그 성격으로 보아 고위관리의 측근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이에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는 모() 경위를 통해 김수임이 남로당에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옥인동 김수임의 집에 정보원을 배치시켰던 바 밤이면 밤마다 고관 및 지명인사(知名人事)들이 모여서 술을 먹고 춤을 즐긴다는 것까지 밝혀 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수임은 수사기관의 최고 고문으로 있는 미국고관과 동거하고 있었고 그 집 2층에는 영국 사람이 거주했던 관계로, 그녀에 대한 정보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며, 드나드는 수상한 인물에 대한 불심검문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썽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범위에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마침내 체포하여, 권총 3정과 실탄 200여발, 많은 불온문서(不穩文書)를 압수 하였습니다.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그를 통해 미 정보를 빼내어 이강국에게 제공한 간첩죄로, 1950319일 체포되어 1950616일 오전 930분부터 속개된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동아일보 1950616일자). 김수임은 최후 진술에서 나는 공산주의를 모릅니다. 다만 이강국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국가를 반역한 내가 더 살아 무엇하겠느냐.”며 전향을 거부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5) 성시백(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 총책)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 평산 태생으로 서울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 겉으로는 장개석 군대의 중령으로 일했지만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프락치로 지하 활동을 하였고, 당시 정향백혹은 정백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성시백은 지금까지 좌익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전술과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즉 당적을 가졌다는 티끌만한 내색도 하지 않고 때와 장소에 따라 무역업자, 이발소 영업주, 또는 모리배로 변신하여 전전함으로써, 상대편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하면서 자기 목적을 수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는 김일성 직계로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남한군사 특급 기밀을 빼돌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중국 장개석 총통과의 비밀회담, 이승만 대통령과 육군 수뇌부만 아는 원자모의 전략 계획서, 1949538선 최전방 국군 배치도 등입니다.

 

성시백의 활동상은 김일성도 감탄할 정도로 무소불위하였으며, 그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하여 공작을 펼쳤습니다. 해방 당시 남북은 조선은행권 동일 화폐를 사용하였는데, 북한은 1947121일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구 화폐 통용을 금지했습니다. 이를 몰랐던 남한은 5개월 늦은 1948425일에야 과도정부 법령 182호로 구 화폐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5개월이라는 공백기에 북한에서 회수한 구 화폐가 남한의 경제교란과 남한에 대한 공작금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당시 대북무역상을 하던 북로당의 성시백이 북한 화폐를 남쪽으로 보급할 최적의 위치에 있었기에 무한대의 역량발휘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시백은 이러한 막대한 자금으로 10개의 신문사를 직접 운영하고, 5개월 공백기 중에 있었던 제주 4.3무장폭동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9485.10선거 때에는 돈으로 막대한 자금력으로 남한의 국회의원 후보들을 돈으로 매수하였습니다. 당시 당선자 198명 중 62명이 성시백으로부터 물질적 후원을 받았습니다. 앞에서는 5.10선거를 반대하고 뒤에서는 자금을 지원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좌파들의 천국을 만들어 갔습니다.

 

1997526일 북한 노동신문’ 2면에 게재된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 혁명 렬사라는 제목의 특집보도에 의하면, 성시백(1905-1950, 황해도 평산 출신, 가명 정향백, 정백)은 남북연석회의 직전 김일성의 특사로 김구에게 파견되는 등 김일성으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는 자로서 19472월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중앙일보, 광명일보10여 개 신문을 발간, 선전선동공작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근로인민당 등 5개 정당을 시작으로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를 흡수하여 조직한 ‘13개 정당협의회를 결성한 후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투쟁하고, 국회, 국방부, 각 병종사령부, 사단, 련대,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 경찰 등에 조직선을 구축하여 와해공작, 정보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제도 검사는 홍민표의 협조를 얻어 1950515일 성시백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 6.25 발발 후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27일 육군형무소에서 간첩죄로 처형했습니다.

 

(6) 이주하(남로당 무장분야 총책)

이주하는 1905년 함남 북청의 화전민(火田民) 출신으로, 원산 사립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잡역부 노릇을 하며 야간으로 와세다전문학교에 다녔고, 그때 지방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였습니다. 1928년 조두원의 천거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1929년엔 원산 시당 책임자가 됐습니다. 해방후 원산에서 함남 공산당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이주하는 조공본부의 이름으로 서울에 와 12월 즈음부터 공식석상에 나타났습니다.

남로당 최고 지도층의 한 사람인 이주하는, 1950327일 김삼룡보다 하루 앞서 시내 예지동 모처에서 서울시 경찰국 사찰진의 빈틈없는 수사망에 걸려 들었습니다. 6.25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628일 김삼룡과 함께 특무대 김창룡에 의해 총살되었습니다.

 

(7) 김삼룡(남로당 총책)

김삼룡은 1910년 충주군 엄정면 용산리 470번지 빈농의 집에서 태어나, 일제 시대에는 김대원, 김성수, 김인업 등의 가명으로 투쟁하다가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해방 후 전주 형무소에서 출옥했습니다.

그는 남한의 남로당원 60만 명의 지도자였으며, 제주 4.3폭동과 14연대 반란을 주도한 자입니다. 김삼룡에 대해 박갑동 씨는 그의 저서에서 조직의 명수로 알려진 김삼룡은 필요에 의해서는 어떠한 단체이든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갖고 있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김삼룡은 이성희라는 가명으로 살았으며, 1비서부터 제 4비서까지도 그의 집을 아는 자가 없었고 단지 접선 장소에서 지령문을 전해 주고 받을 뿐이었습니다. 김삼룡의 얼굴은 홍민표 단 한 사람만 알았으므로, 훗날 오제도 검사가 300여 명을 잡아들여 홍민표에게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게 하였으나, 이때 엉뚱하게 이주하를 잡고 김삼룡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조직을 통한 정보 연락이 긴밀하고 정확했던 까닭에, 절대 불가침의 존재로 알려져 왔던 그가 1950327일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 된 사실에 대하여, 195041일자 경향신문에는 남로당계열 총피검이라는 제하에 남로당 총책임자로 있던 박헌영이 월북한 이래 남한에 머물러 있어 그 후임으로 남로당 총책임자로 있던 김삼룡(41)과 무장분야 총책임자 이주하(46)는 운이 다하여 드디어 지난 327일 서울 시내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남로당은 그 뿌리까지 뽑게 되었다.라고 보도 되었습니다.

 

김삼룡이 체포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950327일 오전 930, 치안국 소속 경찰관이 출근하는데 쓰레기통 뚜껑이 들렸다가 다시 내려져, 이상히 생각하고 들여다보았는데 이마가 넓고 눈썹이 새까맣고 세련되게 생긴 사람이 그 안에 있어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수갑을 채웠습니다.

경찰서에 잡혀 왔음에도 김삼룡은 천하에 내 얼굴을 누가 알겠느냐?’ 생각하고 얼굴을 꼿꼿이 들고 있었는데, 마침 홍민표가 치안본부에 갔다가 화장실 옆에서 수갑에 묶여 있는 김삼룡을 보고 기절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김삼룡은 195064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이주하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체포되었습니다. 경향신문 1950623일자에는 이주하 김삼룡 처의 공판, 24일 비서겸 레포 변정희 등도라는 제하에 남로당 중앙위원 이주하의 처 이기순(李己順, 26), 동 김삼룡의 처 이옥숙(李玉淑) 그리고 김삼룡의 재정조달책임자 겸 비서 이세복(李世馥, 26), 이주하의 개인 비서 겸 레포 변정희(邊貞姬, 28), 문리대 교수 박두온(朴斗溫, 49) 30명에 대한 제 1회 공판은 이봉규 판사 주심 김동수 검사 입회하에 24일 대법정에서 개정하리라 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수감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사변이 터져 628일 새벽 230분 한강을 건너기 전, 김삼룡과 이주하가 김창룡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김창룡은 너희가 수없이 많은 대한민국의 민중들 가슴에 총을 겨누고 목숨을 앗아갔는데 양심도 없구나. 왜 너희들을 살려줘야 하느냐?”라고 하면서 그들을 권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8) 박헌영(남로당 최고 총수)

박헌영은 190051(음력) 충남 예산에서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이학규는 주막을 운영했습니다. 그는 경성고등 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평생을 공산주의운동에 앞장섰지만 끝내는 평양에서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김일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19467월 말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렀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남북한 정세 보고를 들은 후 김일성에게 소련 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한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고,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그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라고 격려했습니다. 스탈린이 이 두 사람에게 던진 두 마디는 소련군 정치 지도자들에게 매우 깊은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들은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했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194891일 수상 선거 때 김일성은 소령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박헌영을 제치고 동년 910, 만장일치의 박수로 수상이 되었습니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부수상 겸 외상이 되었으나 허수아비였고, 남로당에게는 권력이 없는 장관 자리만 주어졌습니다. 김일성은 군과 경찰의 권력을 장악했고, 결국 박헌영과 남로당 제주도 좌익은 이용만 당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동란 이후 김일성은 자기에게 전쟁 결과에 대해 책임 추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숙청하여 반라의 싹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휴전 직후 박헌영을 미국의 스파이로 몰아 투옥했고, 박헌영의 심복인 이승엽과 이강국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도 모조리 사형시키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 버렸습니다. 남로당계의 숙청은 1955년에 투옥 중이던 박헌영을 사형시킴으로서 마무리되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자, 남로당과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걸림 돌 같은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108일 김일성의 집무실에서 유격전의 문제를 놓고 심한 언쟁을 벌인 이후, 11710월 혁명 기념일에 당시 북한 지도부가 피신하고 있었던 만포진의 소련대사관에서 이를 기념하는 연회가 있었다. 김일성은 이때 술이 들어가자 박헌영에게 시비를 걸었다. “여보, 박헌영이! 당신이 그 빨치산이 다 어디에 갔는가?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는가?”라고 비꼬면서 당신이 스탈린한테 어떻게 보고했는가? 우리가 넘어가면 막 일어난다고 당신 그런 얘기 왜 했는가?”라고 추궁하였다. 이에 박헌영은 맞받아치면서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병력을 하나도 못 두었는가? 후방은 어떻게 하고 군대를 다 내보냈는가? 그러니까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이 말에 김일성은 더욱 열을 받아. “, 이 자식아. 이 자식아. 무슨 말인가?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너 무슨 정세 판단을 그렇게 했는가? 어째서 보고를 그렇게 했는가?”라고 하면서 잉크병을 벽에 던져 병을 박살내 버렸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당시 북한외무부 부상이었던 박길룡은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 이미 영 틀어졌다라고 후일 진술하였다.

 

108일과 117일의 격렬한 논쟁 후, 박헌영은 2년간 몰락기를 거쳐 결국 김일성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 처형당하게 됩니다.

 

19533월 하순, 김일성은 박헌영을 체포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박헌영의 범죄혐의에 대해 설명하기를, 해방 직후부터 그 시점까지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했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체포된 직후 박헌영은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195385-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6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박헌영은 당에서 제명되고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때 박헌영과 그 동료들에 관한 결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리승엽 등 제국주의 스파이 변절자들의 암해공작과 파괴행위를 비호 조종했으며 당과 국가를 배반한 박헌영을 출당시키고 재판에 회부한다.”

 

 

19538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재판의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입니다. 12명에 대한 판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형 및 전 재산 몰수 : 이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배철, 백형복, 조용복, 맹종호, 설정식

징역형 및 전 재산 몰수 : 윤순달 15, 이원조 12

 

이 가운데 사형을 언도 받았던 박승원은 사형 집행 전에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모든 혁명가는 설사 그 죄과가 엄청날지라도, 부르고 죽을 조국의 이름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부르고 죽을 그 조국조차 없다.” 한편 이때까지만 해도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으며, 김일성은 자신이 조작한 박헌영의 죄상에 관한 서류를 그 앞에 내놓으면서 이것을 빨리 인정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박헌영은 죽어도 그런 일은 없다고 하며 거부하였고, 이러한 고군분투는 2년 반이란 긴 기간에 걸쳐 계속되었습니다. 김일성 일당이 고문을 하고 협박을 하는가 하면 가족과 같이 여생을 편안히 지내도록 해주겠다는 회유도 하였지만, 박헌영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김일성 일당은 박헌영의 방에 사나운 셰퍼드를 풀어 넣었습니다. 박헌영은 전신을 물어뜯겨 피투성이가 되어, 차라리 김일성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택하고는 너희들이 쓴대로 다 인정하마. 빨리 나를 총살하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합니다.

 

19551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검찰소 검사총장 이송운은 박헌영을 미제국주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1955121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박헌영 재판을 심리할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성원을 발표하였습니다. 재판장에는 최용건, 배석판사로는 김익선, 임해, 방학세, 조성모였는데, 조성모를 제외하고 모두가 법률에 문외한들이었습니다.

 

19551215,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10시간에 걸쳐 비밀재판을 하여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박헌영 재판의 정식 명칭은 피소자 박헌영의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의 기록만도 전 134천 쪽에 달했습니다. 박헌영의 최후 진술 순간 재판정 분위기는 숙연하다 못해 비장함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나는 시정부와 신당 조직, 무장폭동음모에 직접 참가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다. 나는 소위 이 음모사실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 밑에서 활동한 부하들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원하는 대로 처리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재판장과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박헌영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전부 그렇겠지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검사총장 이송운은 피소자의 범죄사실을 확증하는 일체 증거들을 주도면밀하게 심의한 결과, “공화국 법령의 공정하고 준엄한 심판을 제기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말하고는, “백 번 죽어도 인민의 원한을 끌 수 없는 저주로운 미제의 간첩인 피소자 박헌영에게 오직 사형을 내릴 것을 구형했습니다. 재판은 그날 오후 8시에 종료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미제의 고용간첩 두목인 조국 반역자 박헌영에 대한 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 진행”(노동신문 19551218일자)이라는 제목으로 박헌영의 재판 결과가 신문에 보도되었으며, 남한 신문에도 박헌영이 간첩파괴살인 및 폭행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는 사실과 박헌영이 북한 공산정권의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고 보도되었습니다(동아일보 19551220일자).

 

박헌영이 미 제국주의의 간첩 행위를 했다는 이 어처구니 없는 죄목은 다음과 같은 일을 빌미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박갑동씨가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엮은 책, 박헌영26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박헌영)을 좋아한 엘리스는 이 국내에 잠입 차 상해를 떠난 다음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이주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사랑을 오래오래 간직했던 엘리스는 19489월 박헌영이 월북, 북한 김일성 내각의 초대부수장 겸 외상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 그리고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평양에 편지를 보내어 그의 곁에 가겠다고 졸라댔다. 엘리스의 고향은 평안남도이었다 한다. 뜻밖에 엘리스의 편지를 받은 박헌영은 깜짝 놀랐으나 그가 독립운동가의 딸이었고,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평양에 오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박헌영의 세력이 단단한 때이었으니까 거리낄 게 없었다. 그는 이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사정에도 정통하다는 이유로, 그가 수상 자리에 있던 외무성 타이피스트로 채용하여 곁에 있도록 해 주었다.

이것이 나중에 박헌영의 간첩혐의의 빌미가 된다. 박헌영은 원래가 미국의 간첩이며 그 때문에 미국 정보부의 연락책인 엘리스를 평양에까지 끌어들여 간첩행위를 했다는 또 한가지 혐의를 추가받고 처형받게 된다.

 

박헌영에 대한 형 집행은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즉시 처리와는 달리 사형판결이 늦어졌습니다.

1956423-29, 조선노동당 제 3차 대회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종파분자, 미제간첩으로 비난받았습니다.

1956719, 박헌영은 김일성의 특별지시로 마침내 총살을 당했습니다. 대한민국 신생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온갖 폭동과 반란을 지령했던 박헌영은 비참하게도 인근 야산의 잡풀 속에 아무렇게나 매장되어 버렸습니다.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끝내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버림받은 기아(棄兒)가 되어 56세를 일기로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박헌영의 최후와 관련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2004)462-477쪽 내용을 주로 인용하였음을 밝혀둡니다.

 

박헌영은 19493월 스탈린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고 19509월 중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에 크게 공헌하여 다 죽어가는 김일성을 살려냈던 자입니다. 그런 박헌영이 비참하게도 김일성의 손에 죽었습니다.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장례차로 위장하여 이북으로 급히 탈출하여 해주에 있었던 박헌영은 잠시 동안만 있으려니 했으나 월북한 이후 끝내 고향 충남 예산을 다시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박헌영은 북한의 제 2인자의 자리에 있다가 졸지에 반 혁명분자로 몰려 거센 비판과 함께 이슬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김일성은 계획된 수순에 따라 그의 정적을 하나하나 제거하여 마침내 절대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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