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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3. 여수 14연대-반란(순천사건)(3)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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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리산으로 들어간 반란군

 

(1) 지리산에 들어간 김지회 부대의 12연대 공격

여수에 있던 반란군은 진압군과 아무런 충돌 없이 광양을 거쳐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들어갔습니다. 지리산으로 들어간 김지회 부대는 12연대를 공격했습니다. 1948113, 구례군 파도리에서 14연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진압군 12연대의 김두열 소위 중대 90여 명이 반란군에 의해 생포되었습니다. 이때 다행히 탈출한 성찬호 상사 이하 10여 명이 이 상황을 긴급히 보고하였고, 백인기 중령이 1개 중대를 보냈으나 반란군은 이미 흔적도 없었습니다. 성 상사의 보고에 의하면, 김지회와 내통한 이장과 마을 사람들이 환영식을 해 준다는 명목으로 소를 잡고 12연대원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되자, 5분 만에 그들을 생포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의 저녁 식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환대가 아니라 김지회와의 내통에 의한 모략이었습니다.

이 일로 제 12연대는 병력 보충을 요청했고, 김희준 대위가 지휘하는 제 2대대가 114일 새벽 다시 출동하였으나, 반란군 주력의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이날(114), 남원에 설치된 북부지구 전투사령부 원용덕 대령은 예속관계의 재편성을 계기로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각 부대장을 남원에 집합시켰습니다. 명령 전달은 경찰 전화로 했고,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에게는 구례 경찰서를 통하여 전달되었습니다.

그 당시 무전기는 휴대용뿐이라 부대간의 연락은 전적으로 경찰의 경비 전화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례 경찰서 관내 산동 지서를 점령한 반란군이 경찰 전화를 도청하였기 때문에, 백인기 중령 일행이 남원으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기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2)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의 자결

1948114일 오후 330,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남원 진압군 사령부의 연락을 받고 헌병 1개 분대의 경호와 함께 산동면 지서를 지나 고개를 넘으려 할 때(오후 4시경), 매복해 있던 반란군 100여 명의 갑작스러운 집중 사격을 받았습니다. 도망쳐 온 헌병의 진술에 의하면, 이때 운전수의 급정차로 백인기 연대장은 차에서 떨어졌고, 자동차를 방패삼아 권총으로 응전했으나, 헌병 분대장이 권총을 강에 빠뜨렸다고 하면서 먼저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백 중령은 근처 산에서 구원을 기다리려고 했으나, 헌병들이 연대장을 버린 채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되어 6명이 사살 당하고 몇 사람은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혼자 남은 백 중령은 후퇴했으나, 반란군 약 1개 소대가 계속 그를 추격했습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백 중령은, 부근에 있는 농가에 들어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내 시체를 감추어 두었다가 내일 국군이 오면 인도하여 달라고 유언하고, 부근의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권총으로 자결했습니다. 농부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기 중령의 자결 시간이 오후 5시경이므로, 백인기 중령은 약 1시간 가까이 혼자서 버틴 셈입니다. 자결한 대나무 숲이 습격받은 장소에서 불과 150m 거리인 것으로 보아, 반란군은 백 중령을 생포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에 붙잡힌 반란군 하나가 백중령을 생포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위협사격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한편, 이미 도착했어야 할 백인기 중령이 오후 5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구례에서 1개 중대가 연대장의 진로를 따랐고, 4일 밤 남원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115, 연대장을 찾기 위해 구례에서 남원으로 가던 첨병중대 제 5중대의 선두차가 산동의 굽이진 길에 이르렀을 때,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았습니다.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5중대 대원 대부분과 작전주임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뒤따라오던 대대장 김희준 대위는 팔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필사적으로 포복하여 대대주력에게 구출되었습니다. 반란군은 제 5중대원 70-80명을 잡아 산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반란군 진지에는 시체 3구가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5중대 70-80명이 포로로 끌려간 것 외에 전사자 50여 명, 부상자 50여 명 등이 발생했습니다.

 

백인기 중령의 자결 장소는 구례군 산동면 시상리 대나무 숲이었으며, 그때 나이 25세였습니다. 백인기는 전라북도 전주(全州)출신으로 학병으로 출정, 일본육군방공학교를 거쳐 해방 후 귀국하였고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946323일 소위9참위, 參尉)로 임관하였습니다. 그 후 제 3연대 대대장을 거쳐 194851일 군산에서 창설된 제 12연대의 초대 연대장으로 보직되었습니다.

그는 위국감사(爲國敢死: 나라를 위하여 용맹스럽게 목숨을 바침)를 통솔이념으로 삼았다고 하니, 반란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평소 자신의 지론을 실천한 것입니다. 지금은 대나무 숲 옆에 그의 현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3) 반란군의 구례 기습

114, 12연대가 대패하고 백인기 연대장이 자결한 사건은 대한민국이 곧 전복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국군에게 위기감을 주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112일에 9연대의 6중대가 남로당 폭도들의 공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백인엽 부연대장은 낚싯밥 작전을 세워, 김지회가 오면 덮치기로 하고 구례초등학교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지회 또한 머리를 써서 1948117, 반란군 90명에게 400원씩 여비를 주면서 중대장 김두열 소위를 앞장세워 보냈는데, 12연대가 해이해질 때 공격하려고 한 것입니다.

백인엽은 김지회가 보낸 반란군 90명을 잡아 조사를 마친 후, “군법으로 처벌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김지회 반란군을 진압하여 공을 세워 포로 된 불명예를 씻을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반란군을 진압하여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하여 12연대의 돌격중대가 되었습니다. 8일 새벽 4, 김지회 부대가 산을 타고 구례 읍내로 침투하여 구례초등학교에 집결해 있는 백인엽 부대를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공격을 받자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은 부대를 진두지휘하여 송호림 중위와 함께 직접 박격포(81m) 8문을 가지고 봉성산을 사격을 가했고 각 중대도 김지회 부대를 역습하였습니다. 김지회 부대는 박격포의 집중사격으로 혼란에 빠졌고, 각 중대의 과감한 공격으로 도리어 역포위되자 그들은 새벽 5시에 일제히 퇴각하였습니다. 백인엽 소령은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김두열 소위 이하 90명 대원들에게 돌격 앞으로!”를 명령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치욕을 씻기 위해 과감한 돌격전을 감행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했고, 각 중대와 협동하여 포위망을 압축하여 섬멸하였습니다. 결국 김지회 부대는 견디지 못하여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20여 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김지회는 대패한 후 문수리와 노고단을 거쳐 지리산 속 그들의 아지트로 숨어 버렸으며, 다시는 구례에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19481027일 진압군이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사건 8일 만에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상당수의 반란군 잔여 병력이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였습니다. 진압군에 쫓긴 반란군은 게릴라 부대 곧 빨치산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진압군의 작전은 여수 순천의 신속한 탈환이란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수 순천 탈환 속도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반란군들이 산속으로 스며들 퇴로를 열어주게 되어, 이후로 정부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지리산 빨치산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례 기습작전에서 실패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반란군은 산을 타고 북한과 연락하면서 수년 동안 정부에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입산 이후 전술을 장기항전으로 결정하고, 월동을 위하여 흩어져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일부는 노고단 반약산(盤若山)을 경유하여 백운산(1278고지, 해발 1215m)에 근거지를 설정하였고, 일부는 태석봉, 둔철산(812m), 정수산(841m), 감악산(951m), 일대에, 나머지는 달궁, 장안산(1237m), 덕유산(1508m), 천마산(658m), 칠봉, 삼도봉을 연하여 분산하고 유격지를 설정하였습니다. 반란군들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전남북과 경남 일부 지역의 양민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하였습니다. 밤이면 산 아래로 내려와 민가를 기습하여 곡식과 짐승을 약탈해 가고 사람들을 무작위로 잡아갔습니다. 양민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지하에 살아야 했고, 밤에는 반군들의 치하에서 살게 되어 참으로 처세하기가 난처하였습니다.

 

 

4. 국가보안법 제정과 군 내부 좌익 숙군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Security Laws and the purging of leftists inside the military

 

한 나라를 지키는 큰 버팀목이자 국가 주권의 최후 보루인 군대는 사상(思想), 의사(意思), 행동(行動), 명령계통(命令系統) 전부가 선명히 일치(一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아무리 최강의 무기를 소유한 군대라도 그 존재 가치는 아주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사상이 분열되고 명령계통(命令系統) 전부가 선명히 일치(一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아무리 최강의 무기를 소유한 군대라도 그 존재 가치는 아주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사상이 분열되고 명령계통이 똑바로 서지 않는 군대가 어떻게 나라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19481019일에 일어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은 제주 4.3폭동과는 달리, 국군 1개 연대가 순식간에 무기고를 점령하고 반란군으로 돌변, 여수 지방 남로당원들과 합세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맞서서 총부리를 돌린, 국가적으로 위험천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정부와 육군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1022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은 정부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거나 혹은 선동하는 분자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하며 대대적인 숙청을 예고했습니다(자유신문, 19481022일자). 10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지하 공작으로 전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단호하게 숙청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114일 또다시 우선 각 급 학교와 정부 기관을 조사해 공산사상이 만연되지 못하도록 법령을 발표할 것이니 국민들은 절대 복종하라는 담화를 발표해 철자한 숙청과 국가보안법의 제정이 있을 것을 암시했습니다(자유신문, 1948115일자).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 정도 지난 후에, 대한민국 안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한 특별 형법으로, 줄여서 국보법(國保法)’이라고 부릅니다.

국보법의 목적에 대하여 현행 법률 제 5454호 제 1조에는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법이 폐지된다면, 국가의 안전이 위태로워지고 반국가활동을 규제할 도리가 없게 되고 국가 안전과 국민 생존 및 자유가 위협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제 2조에는, 이 법에서 반국가단체라 함은 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개정 91.5.3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칭은 한자로 참람할 참, 일컬을 칭으로 멋대로 분수에 넘치게 스스로 임금이라 이름. 또는 그 칭호란 뜻입니다. ‘정부를 참칭한다’(Claiming the title of the Government)는 것은 정부가 아니면서 스스로 정부임을 자처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정부를 참칭하는 주체는 북한입니다.

 

 

(1) 국가보안법 제정 배경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은 1946년 조선공산당의 위조지폐 발행사건을 기점으로 폭력투쟁이라는 신 전술로 전환하였습니다. 1946년에는 대구에서 대대적인 총파업을 주도하여 10.1폭동이, 그리고 1948년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로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제주 4.3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주도 모슬포 주둔 제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남로당 소속이었던 중대장 문상길 중위에 의해 618일 암살되고, 이어서 1019일 제주 4.3폭동 진압을 위한 육본의 출동명령을 거부하여 일어난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 14연대의 반란을 비롯, 광주 4연대, 마산 15연대, 대구 6연대의 반란 등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19461123일 창당된 남로당은 1948121일에 이르기까지는 합법 정당으로서, 미군정의 보호를 받아가며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마음껏 정치활동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남로당의 반국가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처벌할 법이 없어 정부는 발만 동동 구르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이범석과 참모총장 채병덕이 이런 어려움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곧바로 제헌국회는 그 대책의 일환으로 급하게 법사위에 내란방지법을 기초해 줄 것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사위에서 전문 5조의 국가보안법 초안이 작성되어 그 해 119일의 제 99차 본회의에 제출되었습니다.

이 초안은 법사위에서 8차례의 토의와 법제처장, 법무부장고나 등 정부당국자를 초청한 가운데 열린 간담회의 결과 등을 종합하여 만들었으나, 국회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해 다시 법사위가 법무부장관, 검찰총장과 협의하여 1111일까지 새로운 안을 기초하여 보고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어 후속 입법조치가 이루어져 19481120 국가보안법이 국회 본회의를 전격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년 121일 법률 제 10호로 법령을 통과, 1220일 공포하였습니다.

 

 1948121일자 법률 제 10국가보안법의 전문

 국회의 의결로 확정된 국가보안법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李承晩

단기 4281121

 

국무위원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李範奭)

국무위원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映)

국무위원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국무위원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국무위원 법무부장관 이 인(李 仁)

국무위원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국무위원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국무위원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국무위원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국무위원 교통부장관 허 정(許 政)

국무위원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국무위원 무임소장관 이윤영(李允榮)

 

 

 

제헌국회가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것은, 19481019일 발생한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을 계기로 하여 좌익세력의 폭동과 내란 행위를 처단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의 기틀을 다지고 좌익 세력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건국을 조직적으로 반대하던 좌익계 인사들을 처벌하여 국가를 보전하고, 국민생활을 위협하는 살인, 방화, 파괴 행동을 위한 강력한 대책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국가보안법의 모체인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 대한민국의 국체를 보위한다는 명분 아래 1948920일 김인식 의원 외 33인에 의해 제정동의안이 제출되어 929일 제 77차 본회의에서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0로 이송하여 법안 기초 작업을 하던 중 국회 휴회로 작업이 중단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건국 이후 이념적 혼란 상황에서 국가안보를 위한 법률의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었던 바,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을 계기로 입법부가 보다 신속하게 입법에 나선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약 1년 만에 보안법에 의해 검거 내지 입건된 사람이 118,621명이 달했으며, 19489-10월 사이에 132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해산되었고 , 전국의 18개 형무소와 1개 형무소 지소가 좌익수로 넘쳐 두 개의 형무소가 새로 건설되기도 하였습니다.

 

(2) 국가안보법의 대상 및 개정

법률 제 10호 국가보안법은 제정 당시 전문 6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다음에 의하여 처벌한다.

1. 수괴와 간부는 무기, 3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2.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3.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고 결사 또는 집단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 살인, 방화 또는 운수, 통신기관, 건조물, 기타 중요시설의 파괴 등의 법죄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을 조직한 자나 그 간부의 직에 있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그에 가입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범죄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나 집안이 아니라도 그 간부의 지령 또는 승인하에 단체적 행동으로 살인, 방화, 파괴 등의 범죄행위를 감행한 때에는 대통령은 그 결사나 단체의 해산을 명한다.

3 본법의 죄를 범하게 하거나 그 정()을 알고 총포, 탄약, 도검 또는 금품을 공급, 약속, 기타의 방법으로 자진 방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5 본법의 죄를 범한 자가 자수를 할 때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

6 타인을 모함할 목적으로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관하여 허위의 고발, 위증 또는 직권을 남용하여 범죄 사실을 날조한 자는 당해내용에 해당한 범죄규정으로 처벌한다.

 

부칙

이 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국가보안법은 처음 공포된 후 10차례의 개정 과정을 거쳤습니다. 또한 국가보안법만으로는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1961년 반공법이 제정되었고, 이 또한 4차례의 개정과정을 거쳐 1980년에는 개정된 국가보안법에 전부 흡수, 통합되게 되었습니다(6차 개정).

1991년에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에 대하여 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 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로 그 범위를 선명하게 개념화했고 범위도 한정하였습니다. 또한 금품수수, 잠입·탈출, 찬양·고무, 회합·통신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행한 경우만을 처벌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3) 군 내부 좌익 세력 10,317(숙군 4,749+ 탈영 5,568)

제주 4.3폭동 때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여수 14연대 반란, 광주 4연대, 마산 15연대, 대구 6연대의 반란에 놀란 육본은, 국가보안법이 발표된 이후 군 내부에 거미줄같이 침투해 있는 남로당의 대대적인 숙군(肅軍)을 결심하게 됩니다.

국가보안법의 심사를 거친 결과, 군 내부 각 연대에서 남로당원 가운데 4,749명이 사형, 유기징역, 불명예 제대 등으로 숙군되었으며, 이에 덩달아 놀란 군 내부의 남로당원 5,568명이 탈영하였습니다. 도합 1개 사단 인원, 육군 총병력의 약 10%에 해당하는 10,317명이 좌익 공산 세력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만일 국가보안법 제정이 더 늦어졌거나 아예 없었더라면, 6.25전쟁 시 남로당 소속 군인들이 고위 장교들을 모두 살해하고 남한의 육군을 무력화시켰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하루아침에 저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의 심사를 거치면서 그 숙군 대상에 군 내부의 소령부터 대령까지의 고위급 장교가 여러 명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지구의 숙군은 육군본부정보국 소속의 빈철현 대위가 지휘하는 조사반(이세호, 김창룡, 박평래, 양린석, 이희영)이 광주에 도착, 3,000명을 조사하여 남로당계열 150명을 색출하였습니다. 이때 숙군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문영(동해안 일대 좌익 총책), 강창선, 배명종 중령, 이병주, 장구섭

군사영어학교 출신(10) : 최남근 중령(15연대장), 김종석 중령(여단장 대리), 조병건 소령(육사 교수부장), 오일균 소령(육사 생도대장), 이상진 소령, 최상빈 소령, 이병위 소령, 오규범 중령(1공병단장), 나학선 소령, 하재팔(학병 소위 출신)

육사 1기생(5) : 김학림 소령, 안영길 소령, 김창영 소령, 최창근 대위, 태용

만 대위

육사 2기생(17) : 노재길 대위, 강우석 소령, 안흥만 대위, 최정호 대위, 유병

철 대위, 황택림 대위, 표무원 솔여, 강태무 소령, 최형모 소령, 남재목 대위,

소완섭 대위, 김련 대위, 김보원 대위, 김병환 대위, 황용찬 중위, 김경회 중위,

박정희 소령

육사 3기생(61) : 김응록 중위, 이기종 중위, 정양, 김남근 중위,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등

 

육사 3기생은 군내 좌익 계열의 중핵을 형성하였는데, 그 대표 인물들이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이고, 여수 순천 사건의 주모자 김지회와 홍순석 중위, 그리고 나주 주둔 부대 반란 주모자 김남근, 군산 12연대 2대대의 반란 음모자 김응록 중위(5중대장) 등의 극렬분자들입니다. 육사 3기에 고위 좌파 장교들이 핵심을 이루었던 이유는, 그들이 재학 중 생도대장을 맡았던 오일균, 조변건, 김학림, 김종석 등의 좌파 지휘관이 육사 1기부터 4기까지 생도들의 교육을 담당하여 깊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육사 3기생 281명 임관자 중 258명이 조사를 받았고 60여 명이 숙군 당하였습니다.

194928일에 시작된 서울고등군법회의는 동월 13일의 선고공판에서 73명에게 실형을 언도하였습니다.

총살형 : 최남근 중령, 김종석 중령, 조병건 소령, 오일균 소령, 박정희 소령

무기징역 : 김학림 소령, 배명종 중령 등

그 외 18명에게 15년 징역, 24명에게 10년 징역, 23명에게 5년 징역이 선고됐습니다.

 

만일 국가보안법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좌익 혐의자들을 색출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작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군 내부의 핵심 남로당 간부들은 한국 전쟁 때 대대장 사단장까지 진출하였을 것이고, 이들 장교는 틀림없이 강태무와 표무원처럼 부대를 동원, 반란을 시도하고 후방을 차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수 14연대 반란 때처럼 개전 초기에 군 지휘관들을 모두 총살하고 미군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인민군으로 흡수하여, 모두 총살하고 미군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인민군으로 흡수하여, 국군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군 반란 사건 이후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여 좌익 세력을 숙군 조치한 것은, 대한민국을 구하는 한편 국군을 자유 민주주의의 반석 위에 세운 일이었습니다.

 

(4) 국가보안법 발표 후 강태무·표무원 소령의 월북 사건

강태무(육사 2)나 표무원(육사 2) 두 사람은 194610월 북한의 평양학원 대남반 제 1기로 졸업한 후 곧바로 월남하여 육사 2기로 졸업, 국군에 침투한 자들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발표 이후 남로당 핵심간부들이 연이어 연행되고 철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육사 2기생 남로당원과 박정희, 최남근 중령도 조사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표무원과 강태무는 아예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하였습니다.

 

 

춘천 주둔 8연대 제 1대대장 표무원 소령 대대의 월북

194954, 춘천 주둔 국군 제 1여단 제 8연대 제 1대대장 표무원 소령은, 괴뢰군과 미리 내통하여 그 지령 하에 194954일 오후 1야간 연습이란 명목으로 508의 대대병력을 인솔하여 춘천으로부터 서북방 약 20km 지점인 소위 말고개산맥이라는 38선 접경 이북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대기중이던 괴뢰군에 의하여 포위되자, 표무원은 부하들에게 희생되지 말자.”고 말하면서 적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제 2중대장 최동섭 중위는 대대장 표 소령의 희생되지 말자.”고 운운하는 말에 반대하여 우리는 대대장에게 속았다. 즉시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잠시 후 괴뢰군의 사격을 받아 약간의 교전 끝에 부상을 당했으나 그 틈을 타서 제 3, 4 () 중대와 함께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한정희 중위가 지휘하는 중화기 중대인 제 4중대는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를 가지고 귀환하였으며, 1중대장 김관식 중위만이 표 소령과 같이 하여 이북 지역인 화천(華川)에 이르렀습니다.

일부 대원들은 표 소령의 투항 계략에 의한 괴뢰군의 포위로 말미암아 귀환치 못하였으나, 장교 2명과 병사 291명 총 293M1소총 228, 카빈 소총 44, 자동소총 14, 68미리 기관포와 경기(輕機)4정을 가지고 귀환하였습니다.

 

홍천 주둔 8연대 제 2대대장 강태무 소령 대대의 월북

홍천 주둔 국군 제 1여단 제 8연대 소속 2대대장 강태무 소령도, 괴뢰군과 미리 내통하여 그 지령 하에 200여 명의 부하대원을 인솔하고 194953, 4일 양일간에 걸쳐 38선 참호 구축공사를 하다가, 5일 새벽 1시에는 38선까지 12km 지점인 현리(賢里, 오대산 기슭) 주둔군 약 100명을 합하여 300여 명을 인솔하고 38선 경비라는 명목하에 55일 오후 5시 하답(下沓, 38선 접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괴뢰군의 내습이 빈번한 북죽개봉에 있는 괴뢰군 보안대를 공격한다고 대원들을 속이고 38선을 넘었고, 북한 지역인 인제(麟蹄)로부터 6km 남방지점에서 괴뢰군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강태무 부대는 곧 교전상태에 들어갔으며 약 1시간에 걸쳐서 치열한 교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6, 강태무 소령은 포위되었으니 무기를 버리고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고 부하들에게 외쳤습니다. 김인식 8중대장은 투항하라는 강태무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중화기 중대 제 5, 7중대와 함께 반기를 들고 장렬히 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5중대는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으며 제 7중대 일부는 중과부적으로 괴뢰군에게 투항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장교 1명과 병사 156명이 전사하였으며, 장교 2명과 병사 136명 모두 138이 탈출에 성공하여 M1 소총 81, 카빈 소총 46, 경기(輕機) 2, 기타 기관포, 로케트포 등 4문을 가지고 홍천기지에 돌아왔습니다(경향신문 194958일자, 동아일보 1949511일자).

 

또한 510, 해군 제 2특무정대 508(사령관 황운서 중령, 정장 이기종 소령)이 주문진 근해의 경계임무를 띠고 부산을 출항하여 익일 포항 해상에 이르렀을 때, 좌익계가 일반사병을 내무반에 감금하고 사령관과 정장을 사살한 후 월북했습니다.

·강 소령은 월북 후 제 766군 부대 예하의 제 424, 200부 대장으로 있다가 표무원 부대는 1950625일 강원도 임원진(臨院津)으로 사륙 침투하여 국군의 후방을 교란시켰습니다. 강태무 소령은 월북 후 소장(국군의 준장에 해당)으로 승진, 200641581세로 사망하였습니다.

 

·강 대대의 월북 사건은 상관의 명령이라 해도 그것이 반() 국가적 행위를 강요할 때는 결단코 이에 항의하고 정의를 위하여 신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 점에서, 여순반란사건과는 달리 군에 대한 신뢰감을 북돋워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 불순분자의 색출을 위한 숙군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5) 국가보안법 존치(存置)의 당위성

최근 친북 좌파세력은 국가보안법이 남북화해협력에 걸림돌이 된 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200여 단체 이상이 국가보안법 폐지 범국민 연대회의에 가입해 있으며, 천주교, 불교, 개신교에도 각각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연대기구가 있는데, 이들은 국가보안법이 남북교류를 금지하는 악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국보법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을 해치는 반국가활동을 금지하려는 것이지 남북교류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법은 남북교류협력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으며, 반국가단체 항목도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70년대 초 이후 반공법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남북적십자회담, 경제회담, 국회회담, 체육회담, 이산가족교환방문, 정상회담 등 모두 불편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북한과의 법체계상의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보안법이 존속되어야 합니다. 글 이유는 북한의 형법에서 반국가활동 규제는, 남한의 국보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는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별도의 안보법령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북한 형법 3(반국가 및 반민족범죄)이 우리 형법에서의 국가보안법에 해당됩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보안법에서 처벌하지 않는 것도 광범위하게 처벌하고 있으며 그 형량도 훨씬 무겁습니다. 한마디로 북한의 형법은 김정일 수령과(후계자 김정은) 집권자들의 체제유지를 위해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제거하기 위한 폭력적인 제재수단이며 징벌수단입니다. 이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형을 부과하고 집행할 때, 개인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보장은 전혀 아랑곳없고 오직 당과 수령과 체재유지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2004년에 제 6차로 개정된 북한의 형법은 1999년의 형법(8161)보다 조문수가 2배 가까이 확대되어(9303) 더욱 구체화되었고, 그에 따른 형벌의 종류와 내용도 구체화되었습니다. 개정 형법은 우리의 국가보안법에 상응하는 반국가 및 반민족범죄의 관련 조항들을 더욱 강화한 점이 특색입니다.

 

첫째, 국가주권 침해를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범죄

(59, 66조의 국가전복음모죄, 테로죄, 반국가선전 선동죄, 조국반역죄,

간섭죄, 파괴암해죄, 무장간첩 및 대외관계 단절 사촉죄, 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

)

둘째, 민족해방투쟁을 반대하는 반민족범죄

(67조의 민족반역죄와 제 68조의 조선민족해방운동 탄압죄, 69조의 조선

민족 적대죄)

셋째, 반국가 및 반민족범죄에 대한 은닉, 불신고죄, 방임죄 등

(70, 71, 72)

 

이러한 반국가 및 반민족범죄에 대해서는 사형(67) 등 높은 법정형이 규정되어 있고, 공소시효의 적요도 배제됩니다(57). 많은 북한 주민들이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굶주림에 시달려 북한을 이탈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이를 막기 위하여 반국가 및 반민족범죄에 관한 형사처벌을 강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북한의 극심한 반인륜적 법체계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특히 국방관리질서를 침해한 범죄(국방비밀 누설죄 등 총 16개 조항)라는 항을 신설하였습니다. 또한 반국가 목적이 전혀 아닌데도 북한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나라의 방송을 체계적으로 들었거나 유인물 등을 수집 보관하였거나 유포한 경우에도 심각한 처벌 대상이 됩니다. 바로 6-사회주의 문화를 침해한 범죄안에, 적대방송 청취죄, 인쇄물, 유인물 수집 보관 유포죄(195), 허위날조 유포죄(222)를 신설하여 처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중 반국가 및 반민족범죄에 대해서는, 형사소추시효기간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특례조항(57)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최근 북한 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한국드라마 열풍 등을 차단하기 위하여 법조랑을 신설하고 형량을 높인 것입니다. 북한 주민은 TV나 라디오를 구입하면 1주일 내로 당국에 신고해야 하고 정해진 채널에 봉인을 받아야만 합니다. 모든 주파수와 채널은 조선중앙방송에 고정되어 있으며, 혹시 봉인이 뜯어져 있으면 불법으로 외국 방송을 청취한 것으로 간주하고 정치범으로 처벌합니다. 이처럼 자유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나라가 바로 북한입니다.

실제로 20051, 32세 가량의 한 남성은 한국방송을 듣고 한국노래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청진시 라남구역 라남시장 앞 마당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습니다. 일일이 거론치 않더라도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겠습니까?

북한은 백성들의 자유를 그렇게 박탈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반국가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당의 대책으로 범죄행위를 하기전에 어떤 여건이나 틈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아래 대중적인 감시를 진행합니다.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국가 사회생활 전반에서 혁명적 제도와 질서를 앞세우고 규율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로도 반국가 적대분자로 몰아 무자비하고 엄격하게 처벌합니다.

 

이상과 같은 이북 살인마들의 가혹하기 짝이 없는 헌법과 노동당 규약 및 형법 등은 그대로 둔 채, 남한의 보안법만 성급하게 폐기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전보호장치를 완전히 해체하는 자살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지키는 최후 방어선인 국보법의 폐지는, 이북이 반국가 반민족범죄의 처벌 형법을 먼저 없애거나 대폭 축소한 후에라야 생각해 볼 문제이지, 그 이전에는 결코 있을 수도 없고 함부로 언급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소속된 백성이라면 국보법 폐지를 외치기 전에, 이북의 반국가 반민족범죄 처벌 형법과의 형평성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입니다.

 

더구나 현재 이북의 도발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국보법 폐지를 외친다는 것은, 시기 면에서도 결코 적절하지 않습니다. 청와대 기습 사건(1968.1.21.),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1968.10.30.), 판문점 도끼만행(1976.8.18.), 아웅산 테러(1983.10.9.), KAL858기 폭파(1987.11.29.), 1차 연평해전(1999.6.15.), 2차 연평해전(2002.6.29.), 천안함 폭침(2010.3.26.), 연평도 무력공격(2010.11.23.) 등 북한은 끊임없이 호시탐탐 우리 정부에 대하여 도발을 일삼아 왔습니다. 이러한 때 국보법이 폐지된다면 국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극대화될 것입니다.

 

국보법을 폐지할 경우 다음과 같은 중대한 안보위협행위를 처벌 할 수 없게 됩니다.

 

친북 간첩 활동 증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공산당 창당

서울 시가지에서의 친북좌익 노선의 독립공화국 수립 선포

사설 연구소에서 주체사상 강좌 개설 및 강의 교육

친북단체가 북한의 대남사업부서와의 무단 팩스 왕래 및 반국가적 목적의 의

사소통

북한 공작원에게 돈을 받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행위

북한 공작원의 내국인과의 접촉

광화문에서 인공기를 흔들거나 가옥에 게양하는 행위 등 국가 정체성을 심대

하게 훼손하는 행위

주체사상 및 북한 우상화 책자들을 무단 복제하여 판매하는 행위

 

국가보안법은 우리나라의 국가체제수호를 위하여 필수적인 법적 장치입니다. 이북 또한 우리나라를 으로 간주하면서 날이 갈수록 자기 나라 인민들에게 가혹한 보안 형법을 대폭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이나 북한의 도발 행위로 말미암아 국가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으로 볼 때, 국가보안법 폐기 주장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국보법을 적용할 때,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없도록 확대해석되거나 확대적용되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노력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5. 서울시당 홍민표와 그에 의한 33만 명 자수

The surrender of Hong Min-pyo of the Seoul Faction and the subsequent wurrender of 330,000 people instigated by him

 

박헌영은 남조선 전 당원을 동원해 4월에 봉기하여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남조선을 해방하고, 1949920일 조선 인민공화구 총선을 실시할 것이다. 서울시 책임은 홍민표에게 맡겨 총 궐기하라고 남로당 총책 김삼룡에게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김삼룡은 남로당 서울시당홍민표에게 2천만 원을 주면서 수류탄 만 개로 6만 당원을 동원하여 4월에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박헌영의 지령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장폭동은 계속 지연되어 수류탄 6천 개를 압수당하는 등 차질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큰 위기가 지나간 것입니다.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들자는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자 김삼룡은 홍민표에게 소환장을 주면서 평양으로 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홍민표는 평양으로 가면 죽을 것이 뻔하고 자수를 해도 남로당 특수부대에 잡혀 살해될 것이 뻔하므로, 잔꾀를 써서 을지로 4가에서 무교동까지 나 좀 잡아가시오.’하는 식으로 걸어가다가 수사본부요원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습니다.

홍민표는 오제도 검사에게 모든 것을 순순히 대답하고 부탁하기를, “시경 회의실에서 서울시 남로당 상임위원회를 열게 해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홍민표는 최운하 형사와 지프차를 타고 다니면서 남로당 핵심 간부 16명을 불러 모았고, 그들을 전향시켰습니다. 이때 홍민표는 두 시간을 걸쳐 남로당 위원들을 여러 말로 설득하였는데, “지금까지 폭력투쟁이 손실만 있었지 이득이 없었고, 보안법이 만들어져 남로당은 끝났습니다. 박헌영 개인 목적을 위해 폭력투쟁을 지령하는 것에 언제까지 복종하겠습니까? 반헌영이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였으나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생명은 귀하고 한 번 죽으면 두 번 살지 못합니다. 우리 같이 자수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남로당 특수부대 사령관 조병수를 비롯한 위원들은 한 사람도 반대 없이 눈물을 흘리며 동의하고 전향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19491025-30일을 자수 기간으로 정하였고, 다시 1130일까지 연장하여 전국 자수자가 약 33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195031일에는 남로당 특별공작원 196명이 체포되어 남로당은 더욱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6.25전쟁 발발 3일 만인 6우러 28일에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하고, 630일까지 3일간 지체하면서 한강을 건너지 않고 남로당원의 폭동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예상한 남로당 20만 명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홍민표를 통해 33만 명 가량이나 자수한 결과, 남한 내의 공산당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민표에 의해 남로당원 33만 명이 주수하게 되자, 이북의 지령을 남한에서 접선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남로당에게 대단히 큰 타격이었습니다. 특히 195031일 남로당 특별공작원 196명이 체포된 일과 317일 남로당의 거물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된 것은 남로당 조직에 가장 큰 결정타였습니다. 남로당은 조직 특성상 횡은 약하고 종으로 강하기 때문에, 윗 단계와의 접선을 실패하면 그 조직이 무너지기 십상이었습니다.

당시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로 남로당의 남한 총책임자가 된 박갑동은 서울, 대전, 팔공산, 지리산(빨치산 부대 이현상, 경남, 전남, 전북 도당)으로 각각 분산되어 고립된 남로당원들을 연결시켜 규합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서울시 인민위원장으로 내려왔던 이승엽과의 알력 때문에 남로당원의 동원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박갑동은 이승엽을 피해 숨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갑작스런 남ㄹ당 33만 명의 자수, 김삼룡, 이주하의 체포, 북에 있는 박헌영과 박갑동의 접선 실패로, 남로당 세력은 더 이상 하나로 모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박갑동을 비롯한 남한의 남로당원 중에는 인민군의 남침 소식조차 몰랐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홍민표가 전향할 때, 상형문자로 된 암호를 유일하게 해독할 줄 아는 이태철까지 전향한 것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홍민표와 남로당 33만 명의 자수는,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큰소리쳤던 대로 6.25동란 때 실제 일어날 뻔했던 20만 남로당의 봉기를 미리 차단시킨 엄청난 효력을 나타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가 조용히 지나간 것입니다.

 

6. 국회 내 프락치에 의한 미군 철수

The withdrawal of American troops caused by moles in the National Assembly

 

1948sus 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보면서 미군도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제주 4.3폭동과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이 어느 정도 진압된 후 미군은 주한 미 군사 고문단(KMAG)487명만 남기고, 미 제 5연대 전투단의 철수를 마지막으로 45,000명 모두 19496우러 30일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미군이 철수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권 내부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었던 공산당 세력(좌익 세력-남로당)의 선전 선동과 프락치 활동이 있었습니다. 1948121일 국가보안법이 공포되고 실시되자, 1949년 남로당 조직은 합법을 위장하여 신생 정부 및 각 중요 관공서에 침투, 남한 정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위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비합법투쟁과 병행하여 국회 내 합법적 투쟁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습니다.

남로당 국회공작 책임자 이삼혁(李三赫)이란 자가 194812월 말에 남파되어 국회 소장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노일환을 포섭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194924일 남로당에 가입시켰습니다. 또 이삼혁은 하사복(河四福)이란 또다른 별명으로 국회의원 이문원에게 접근하여 194924일 남로당에 가입시켰습니다.

 

남로당은 포섭된 노일환과 이문원에게 국회에 외국군 철퇴안을 상정하라 외국군 철퇴안 상정이 어렵거나 부결된 경우에는 즉시 국제연합 한국위원회에 외국군 철퇴를 주장하는 진언서를 제출하라 외국군 철퇴안에 찬성하는 총연판자 100명을 확보하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지령을 내렸습니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김약수를 중심으로 뜻이 맞는 13명의 국회의원을 프락치로 규합하여 남로당의 지령대로 외국군 철퇴안을 상정하였지만 이것은 두 차례나 부결되었습니다.

 

이에 남로당 국회 프락치들은, 국회에서 미군 철수안이 벌써 2차부결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남한 내의 정세에 비추어 도저히 상정 통과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194933일 오후 2시 경 종로구 서린동 음식점 평화옥에서 외국군 철수안 상정은 곤란하므로 유엔한국위원회에 진언서만을 제출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고,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미군의 급속 철퇴를 요망한다는 취지의 진언서를 작성하여 그 연판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316일까지 62명의 국회의원들이 프락치들의 영향을 받아 미군 철수 안에 서명하였습니다.

319일 오후 1030분 국회의원 62명이 서명한 외국 군대 철퇴 진언서를 제출하였고, 322일 오후 6시 경, 이를 선전하기 위해서 국내 각 신문기자 10여 명을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모() 음식점에 초청하여 진언서 제출의 경위를 설명하고, 외군(外軍) 주재하에서는 진정한 민주적 통일은 없고, 외군(外軍) 주재 하에서 되는 통일이란 새로운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등의 담화를 발표하여, 미군의 즉각 철퇴를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노일환과 이문원은 321일에는 남로당으로부터 제 2차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꿀 것 북벌론을 반대하고 대미(對美) 무기청구를 중지시킬 것 내각 총사퇴 요구투쟁을 전개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남한에 잔류하게 된 미 군사고문단까지 철수시키기 위해 617일 오전 9시 경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144번지 김약수 집에서 화합하였습니다. 오전 10시 경 김약수는 마치 미군 철퇴요청 진언서 제출자 62명의 대표인 것처럼 대표 김약수(金若水)’라고 서명한 것을 가지고, 덕수궁에 있는 유엔한국위원회사무국장 하이만을 방문하여 우리 62명의 의원은 미 군사고문단 설치를 원치 않는다.”라는 취지의 서한을 전달하였습니다.

 

당시 국회 부의장이었던 김약수(본명: 김두전)1920년대부터 북풍회, 화요회, 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해방 후에는 국회 부의장으로서 반민특위를 조직하여 친일파 숙청에 힘쓰는 척하면서 공산당 활동을 은밀하게 하다가 발각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6.25가 발발하자 월북하였습니다.

당시 김약수가 주장한 내용은 공산당이 주장하던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었습니다. 특별수사본부 오제도 검사가 김약수 등 관련자 13명의 의원을 검거하여 수사한 결과, 이들은 남로당 특수공작원들과 접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남로당 여성 공작원 정재한(鄭載漢)에게서 발견된 암호문서였습니다. 정재한은 서울-개성간 레포(연락원)였습니다. 그녀의 음부(陰部)에서 발견된 암호문서 해독은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포 후 만 사흘 만에 해결되었습니다.

이 암호문서는 이삼혁이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였는데, 그 내용은 남로당으로부터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통과시키겠다는 것 유엔한국위원회에 외군철퇴(外軍撤退)의 진언서를 제출하라.’라는 남로당의 지령을 이삼혁이 이문원(李文源), 노일환(盧鎰煥) 등 국회 내 공작 핵심분자에게 내렸다는 것 박윤원(朴允源), 김병회(金秉會), 황윤호(黃潤鎬), 서용길(徐容吉), 강욱중(姜旭中), 김약수(金若水), 이구수(李龜洙), 김옥주(金沃周), 배중혁(裵重赫), 최태규(崔泰奎) 등을 대국회공작의 중심으로 하여 외군 철퇴안을 상정 통과 시키려 하였으나, 국회 내 정세에 의하여 그것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주동이 되어 연판운동(連判運動)을 개시한 결과 62명을 획득하여 유엔한국위원회에 진언서를 제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서 암호 기례(起例): 노일환(盧鎰煥), : 이문원(李文源), : 황윤호(黃潤鎬) 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계간 <역사비평> 가을호 우리 역사 바로 알자라는 난에 실린 국회프락치사건, 사실인가?에서 49년의 국회 프락치 사건을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공작원 정여인(정재한)이 유령의 인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한겨레신문 1989824일자 7). 그러나 암호문서를 유대하고 월북하려던 정재한을 검거하는 과정을 담은 수사일기(搜査日記)라는 책에 의하면 정재한이 분명한 실존 인물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경북 문경이 고향인 정재한은 14세 때 이점복과 결혼, 28세에 서울에 이사온 후 30세에 과부가 되어 빈대떡 노점을 하는 등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던 중, 4710월 하순 남로당원 전구하(全九河)집을 구해 주고 생활보장을 해 줄 테니 남북연락을 해보라고 권해 이에 응하고 서울 종로구 도렴동을 아지트로 남북연락을 했다.”(: 동아일보사편 비화 제 1공화국 제 2’ 59)

 

또한 박원순 변호사는 비밀 보고문에 대하여, 평양의 박헌영이 매일 전달되는 신문을 통해서도 알 만한 내용을 암호로 만들어 여자 특수 공작원의 음부 속에 넣어 보냈다는 검찰의 발표는 말이 안된다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 보고문에는 누구누구를 핵심부로 구성하여 외군 철퇴 연판투쟁을 한 결과 여기에 소비된 자금은 총 얼마이고 누구는 열성적으로 투쟁, 27명을 확보했고 누구는 6명을 확보했지만 1명의 반동이 서명을 취소했고 계속 서명 취소 요구자가 있으며 반동의 조직적 방해 공세로 조성되는 정세가 불리하여 1백 명 목표를 포기하고 62명의 서명으로 진언서를 전달하게 됐으며라는 표현으로, 도저히 신문에는 보도될 수 없는 내용들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정재한을 심문했던 김호익경사는 수사일기(搜査日記)에서 이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재한은 목석이라도 된 듯 꼼짝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우리는 차마 당신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소. 당신 스스로 꺼내 보이시오.’ 이 말이 떨어지자 정은 할 수 없다고 체념한 듯, 생리대처럼 차고 있던 것을 속바지에서 꺼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동안 노심초사 추적했던 연락문건이었다. 우리는 정의 국부에서 나온 문건을 압수하고, 이 형사를 불러 정에게 수갑을 채우게 한 다음 파출소 유치장에 넣고 우리는 또 다른 연루자를 찾으러 파출소를 나왔다.

 

남로당은 이 사건이 공안당국에 의해 발각되자 담당검사와 수사관 암살을 여러 차례 계획했습니다. 1949812, 남로당 특수행동대원 이용운은 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던 김호익(金昊翊) 총경을 암살하였습니다. 김호익 총경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에 유학한 바 있으며, 8·15해방 직전 경찰계에 투신하여 해방 후에는 중부서(中部署) 사찰계 형사로 활약하였습니다. 중부서 재임시부터 그는 멸공전선에서 다대한 공헌을 하여 상사의 총애를 한 몸에 지나게 되어 마침내 서울시경찰과 정보주임으로 승진되었습니다. 또한 19496우러 17일 국회프락치사건 관계자 이문원의원 등 13명의 국회의원을 검거한 공로로 그는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고, 경감이 되어 서울시경찰국 사찰과 중앙분실장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김호익 총경은 19498우러 12일 상오 11, 중앙분실 가운데 방에서 이용운이 쏜 총을 맞고 병원에 실려간지 1시간도 못 되어 숨지고 말았습니다. 범인 이용운은 권총을 앞가슴에 차고 내무부치안국모고관의 위조명함을 가지고 총경실로 들어갔으며, 김호익 총경이 명함을 받아 보는 순간에 연속하여 7발을 발사하여 그를 쓰러뜨렸습니다(동아일보 1949815일자).

이용운은 가증하게도 살인을 했으니까 너도 사형이라고! 천만에,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또한 당신들이 나를 죽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재판놀음(3심까지의 재판과정)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인민공화국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살인범이 아니라 인민의 이름으로 반동을 처단한 영웅이다. 영웅을 죽이는 것 봤나?”라고 발악하였습니다. 그 스스로 공산당의 지령에 절대 복종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김호익 총경의 피살 사건은 국회 프락치 사건이 거짓이 아니라 남로당에 의해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남로당에서 지령 받은 명사수 이용운은 재판부로부터 1949930일 사형을 언도받아, 11월 처형되었습니다.

1949619일부터 육군 헌병사령부에 국회 프락치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었고, 첫 공판이 1차 검거 후 7개월 만인 19491117일에 열렸으며, 이후 총 14차에 걸친 공판 끝에 사실 심리와 증거 조사를 모두 끝냈습니다.

이 사건은 서울지방법원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50여 명이라는 다수의 변호인 입회하에 장기간 심리를 거듭했던 사건으로, 13명 전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하였습니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박윤원은 구속 취조 중에 다음과 같이 그의 심경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북한 공산당에 이용물이 되었음을 아래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625일 경 취조시에 나는 참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국회 내에서 우리 소장파가 한 행동을 암호로 해서 이북에 보낸 것이 압수되어서 나에게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의하면 우리가 모두 암호로 되어 있고 행동이 일일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 행동이 일일이 지시에 의해서 한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적구(赤狗 : ‘붉은 개란 뜻으로 북한 공산당을 지칭함)의 작란(作亂)이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195031415차 공판(선고공판)에서 서울지방법원(사광옥 판사 주심, 박용원·정인상 판사 배심)은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이문원·노일환 징역 10, 김약수·박윤원 징역 8, 김옥주·강욱중·황윤호·김병회 징역 6, 오택관 징역 4, 이구수·최태규·신성균·서용길·배중혁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재판을 진행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서용길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이 월북하면서 사건이 종료되었습니다.

 

실로 국회 프락치 사건을 통해서 국회 내에 잠입한 남로당 세력의 정체가 비합법적, 합법적 투쟁 등 모든 투쟁의 수단을 동원하여 심지어 정부기관 내부까지 깊숙이 활동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남로당에 의한 국회 장악 음모가 더 진행되기 전에 밝혀진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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