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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3. 여수 14연대-반란(순천사건)(2) 운영자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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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수와 순천의 탈환

 

순천 탈환(1022)

1021, 12연대 3대대 9중대(중대장 송호림 중위)는 동천강을 끼고 전진하여 순천농업학교까지 돌입하였다가 포위를 당하였는데, 전투 경험이 없던 신병들이라 모두 숨어 버렸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김백일 대령이 송 중위에게 5명씩 10개조를 편성하여 적진의 중앙을 돌파하라고 하였습니다. 송 중위는 즉각 대원들을 재편성하고 선두에서 돌격을 지휘하여 도리어 반군 1개 소대를 역포위하였는데, 또다시 그 일대의 반ㄹ나군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하천을 방어하고 있어 불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송 중위는 상호거리 30m 간격을 두고 협상을 제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진압군이 반란군에 합류하겠다는 뜻으로 알고, 반란군 대표가 나와 속히 합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 소령이 송 중위에게 돌격하라고 명령하자 합류를 기대하며 방심하던 반란군은 당황해 하였습니다. 송 중위는 명령대로 반란군을 향해 뛰었는데 한 사람도 뒤따라오지 않자 등골이 오싹했던 송 중위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차렷!” 하면서 너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총을 버려라하고 고함쳤습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서 반란군도 얼떨떨하여 1개 중대 187명이 총을 버리고 손을 들어습니다. 송호림 중대장은 참으로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써 기적적인 성과를 이룩해 낸 것입니다. 포위된 187명 대부분은, 좌익들에 의해 할 수 없이 반란군에 가입한 자들로 자수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3연대와 제 12연대는 외곽지를 확보하고 22일 여명을 기하여 일제히 시가지 소탕전에 들어갔습니다. 밤중에 반군들이 대부분 도주하였기 때문에 오전 안에 순천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12연대는 순천탈환의 전공을 세운 제 5여단장 김백일 대령이 표창을 받았고, 2일간을 정비하면서 순천 시내의 질서회복을 임하였습니다.

한편 반란군들의 주력이 이미 퇴각하였음에도 지방 폭도들과 학생들의 무모한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보성 ·고흥 · 광양 점령

정부는 순천을 진압한 후, 보성·고흥·광양 등 전남 동부지역 나머지 군들에 대해서도 진압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순천의 서쪽 보성은 1021일부터 진압군 4연대가 공격을 시작, 10244연대(오덕준 중령 지휘)와 수도경찰부대가 보성을 점령했습니다. 순천과 보성의 중간 지대인 벌교는, 순천 점령 후 진압군 6연대(김종갑 중령 지휘) 2중대, 3연대 3중대 수색대대가 102412시에 점령했습니다. 진압군은 이어 남쪽인 고흥반도로 반군을 몰아넣고 봉쇄후, 6연대와 3연대 병력이 고흥으로 남진, 1025일 오전 8시 공격을 개시해 오전 10시 고흥을 점령했습니다.

순천의 동쪽인 광양으로 진격한 진압군 15연대는 1021일 반군의 공격을 받고 최남근 연대장이 그들에게 생포됐지만, 1023-24일에 걸쳐 제 4연대 2개 중대가 올라와 투입되었고, 12연대 2대대(김희준 대위)가 지원 병력으로 광양에 투입되어 10241720분경 광양을 장악했습니다.

 

여수 탈환(1027)

1021일 밤, 진압군 사령관 송호성과 참모장 백선엽, 연대장들이 모였습니다. 이때 백선엽 참모장은 광야과 백운산, 지리산 입구를 봉쇄하여 반란군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호성 사령관은 순천과 여수를 빨리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작전은 송호성 사령관의 주장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란군 김지회는 백선엽 참모장이 지적한 대로 1021일 밤 10시를 기해 순천을 빠져 나와 광양과 백운산,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갈 계획으로 무기와 식량을 갖추고 출발을 서둘렀습니다. 전투사령부에서는 반란군들이 광양 방면으로 퇴각한 것을 포착하고, 22일에는 제 4연대의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광양에 우선 진격하여 적의 상태를 파악한 후에 적절한 대책을 수립키로 하였습니다.

 

순천을 단숨에 점령했던 국군은 1024, 여수 탈환을 위해 진격했으나 반란군의 공격과 좌익 단체들의 기습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진압군의 희생이 계속 늘고 부상자가 속출하여 전열은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날 송호성 사령관은 장갑부대의 선발부대로 나서 지휘하다가 여수 근처 미평리에서 무장 폭도들의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받아 고막이 찢어지고 차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고 순천의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결국 진압군 제 12연대는 순천으로 후퇴하였습니다.

 

한편, 반란 근거리인 여수가 반란 발생 이래 6일간이나 반란군 치하에 있어 나라 안이 온통 떠들썩했고 민심은 동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어서 전투사령부는 총력을 여수에 집중하기로 하고 해군의 충무공호를 위시한 7호의 경비정과 부산(釜山) 5여단의 1개 대대병력을 여수에 에 상륙시켜 해륙양면에서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육군부대는 순천 방면에서 남하하여 미평 방면에 집결하였습니다. 국군 진입과 더불어 지하에 숨어 있던 생존 경찰관 청년단원, 관공서원 등이 나와서 진압군을 환영하고 반도들을 적발해 냈습니다. 이때 14연대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도 배수구에 숨어 있다가 국군들에 의하여 구출되었습니다.

 

여수 미평리 근처에서의 전투를 끝낸 지창수는 바로 그날 밤(1024) 여수를 탈출했습니다. 여수의 잔류병력 대부분과 무장폭도들을 이끌고 백운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반란군이 여수에서 서둘러 빠져 나갔고, 남로당 무장세력 1천여 명과 동조세력 1,200여 명이 여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시내에는 폭도들과 남녀학생들이 날뛰고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악질적이라고 알려진 것이 여수여중학생들이었습니다. 여학생 중에는 국군을 환영하는 척 하며 물을 준다고 유도하여 권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예가 몇 건 있었습니다.

함병선 소령이 여수여중을 1개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수색하였는 때, 여수반란의 민간총지휘자가 그 학교 교장 송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지에서 함병선 대령은 여중생이 쏜 총에 맞을 뻔하기도 했는데, 그 여학생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북에서 인민군이 내려와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리어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 여중생을 데리고 여수 시내로 갔을 때 그런 학생 200여 명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반란군은 선량한 시민들과 철없는 여중생들까지 선동, 방송청취를 금지시켜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진압하는 군경들은 동족 살상자이고, 반란군은 인민 해방을 위해 봉기한 군대라고 선전했습니다.

 

장갑부대가 선발부대가 되어 전진하고, 12연대가 동쪽, 3연대는 200고지와 종고산, 2연대는 여수 서부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란군이 한 명도 없었고, 오후 3, 구봉산, 종고산, 장군산 등 야산 고지를 공격하였으나 반란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27일 오후 330, 진압군은 하루 종일 시가전을 해서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였습니다. 이틈에 반란군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진압군의 저항 없이 들어갔습니다.

 

4연대의 박기병 소령이 여수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광주 사태가 험악해진다는 정보에 의하여 4연대는 복귀하고, 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이 여수 지구 후방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한편 중앙초등학교에 헌병대와 수도경찰대가 자리잡고 반도들을 적발하여 처단하였는데, 5연대 대대장 김종원 대위는 일본도를 가지고 직접 참수처분을 단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반도들의 처단은 상당한 시일을 두고 계속되었는데,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양민들이 군경부대에 의하여 무고하게 희생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수와 순천에서의 피해

백선엽 참모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반란군을 막고 있던 12연대, 2연대 1개 대대, 5연대 1개 대대를 1026일 오전 6시 여수에 모두 투입하여 1027일 오후 330,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였습니다.

 

1948116일 호남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고, 국방부는 1021일부터 1031일까지의 종합전과를 1110일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전 사 61(장교9, 하사관29, 사병23)

부 상 119(장교7, 하사관33, 사병79)

실 종 4

 

여수에서의 민간 희생자는 반란군에게 학살 당한 양민 1,200여 명, 반란군에 부상 당한 양민 1,150여 명, 소실 및 파괴된 가옥 1,538, 행방불명자 3,500여 명, 이재민 9,800여 명이었습니다.

 

반란군들과 좌익 폭도들이 순천에서 저지른 만행들은 여수에서보다 더욱 잔인해습니다. 반란에 가장 선봉적으로 가담했던 것은 민주학연의 남녀학생들이었습니다. 특히 순천 중학교의 학생들은 소위 인민재판에서 형이 결정되면 서슴지 않고 나서서 총살, 타살(打殺: 때려서 죽임), 소살(燒殺: 불태워 죽임)을 하였습니다. 어제까지 제자, 점원, 하인, 고용인들이었던 자들이 오늘은 적이 되어 처절한 살상극으로 피바다를 이룬 것입니다.

당시 순천에서 반란군에 학살 당한 양민1,134, 행방불명자818, 사살된 반란군392, 포로1,512명이었습니다.

기타 지방에서 학살된 인명 피해는 광양이 57, 보성이 80, 구례가 30, 고흥이 26, 곡성이 6명 등이었습니다.

 

여수 순천 양 지방을 비롯한 도내 각지의 반란 사건에 직접 가담한 일반 폭도들에 대한 고등군법회의가 1113, 14일 양일간에 걸쳐 순천에서 개정되었습니다. 동 군법회의(당시 담당법무관 김완용 대령 주심)에서는 12일 현재 검거된 458명의 피의자에 대하여 심리를 열었는데 양민으로 판명되어 석방된 자가 190명이고, 나머지 268명중 사형이 102명에 달했고 20년 징역 79, 5년 징역 79, 무죄석방 11명이었습니다.

한편 전라남도 당국에서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된 불순 교원 숙청을 단행, 11우러 17일 제 1차로 초등학교 교사 61명을 파면하였습니다. 또 제 8관구 경찰청에서는 반란 사건을 예기로 113일부터 11일까지 활동을 개시한 후 3,539명을 검거하였는데 그 중 순천 여수 등지의 반란 관계자가 3,293명에 달하였습니다.

여수 14연대는 19481028일 날짜로 영구히 해체되었습니다.

1949110, 육군사령부에서는 여수·순천 사건과 관련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반란군 혐의자의 재판결과를 발표했는데, 2,817명의 반란 가담자가 재판에 회부되고 410명이 사형, 568명이 종신형, 나머지는 유죄 혹은 석방되었습니다.

 

 

(14)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동인, 동신)의 처형

전남 여수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는 19026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40925일 신사참배 거부로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었고, 19401117일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1943107일까지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형기가 만료된 날 담당검사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하며 앞으로는 헛수고 말고 잘 협조해 달라고 하자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해서만 밝아짐으로 나를 옥중에 가둠은 내게 유익이요, 큰 축복이니 헛수고란, 나를 가둔 당신네들이 헛수고한 것이요라고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곧바로 청주 예비구금소로 옮겨가 또다시 옥고를 치르고 1945817일 해방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석방되었습니다.

손 목사가 6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면서 집안 형편은 너무나 어려워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내기도 하고 생계를 꾸려가는 일은 두 아들 동인·동신이의 몫이었습니다. 부친 손 목사가 출옥한 후에 뒤늦게 학교에 편입한 동인·동신은 늙은 중학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4810월 여수 순천 사건이 터졌을 때 순천사범 6학년 동인과 순천 중학 2학년 동신이 좌익 학생들에 의해 총살되었습니다(19481021).

당시 큰아들 동인은 기독학생회 회장이어서, 민애청의 지령으로 제일 첫 번째로 잡혀갔습니다. 동인·동신 형제는 예수 정신을 가진 친미파로 몰려 10여 명의 좌익 학생들이 몰려와 그들을 끌어내었고, 동인은 주먹과 나무토막, 총자루로 연신 두들겨 맞아서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동인·동신 형제는 민애청 총책이었던 순천사범 5학년 최정길(가명) 학생에게 온갖 고초를 당한 후 본부에서 순천경찰서 후정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총살당한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형제를 끌고 간 좌익 학생들이 동인을 시체더미 앞에 세우고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린 후 5명의 사수가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를본 동생 동신은 형에게 뛰어가 막아서며 형은 장남이니 부모님을 모셔야 하니까 제발 우리 형님만은 살려 주시오. 형님 대신 내가 죽을 터이니 형님을 살려 주시오.”라고 절규했습니다.

동인은 마지막으로 내가 죽고 난 후에라도 너희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나는 천당으로 간다마는 너희는 무서운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면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이에 흥분한 좌익 학생이 이를 갈면서 사격을 명했고, 동인은 M1 소총에 가슴을 맞고 피를 흘리며 이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동신은 형의 시신을 껴안고 흐느끼다가 좌익 학생들을 향하여 왜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느냐? 피 흘린 죄를 어떻게 면하려 하느냐? 이제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이놈은 형보다 더 지독하다고 하면서 5명의 사수가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겼고, 두 팔을 든 동신이 힘없이 형 동인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동인(24), 동신(19)은 같은 날 나란히 순교했습니다.

이 소식은 총살당한 지 나흘이 지난 1025, 설마 하며 마음 졸이던 가족들에게 전달되었고, 두 아들의 시신은 1026일 석양 무렵 애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은 반란군이 국군에 의해 진압된 1027일 오전 10시에 치러졌습니다. 비통에 젖은 손양원 목사님은 두 대의 상여를 뒤따라가며 동인아, 동신아!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찬송을 불렀는데, 찬송이 오열이 되고 오열이 다시 찬송이 되었습니다. 손 목사는 답사 차례가 되자, 전날 준비한 <10가지 감사문>을 침착하게 읽어내려 갔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으니 감사

셋째, 3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

여섯째, 미국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큰 아들-성악, 작은 아들-신학),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아음 안심되어 감사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께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아들을 잃어버려 한없는 비통에 젖어 있는 순간에 10가지 감사를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는 답사를 마치고 중요한 결심을 발표했는데,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회개시키고 새사람으로 ㅁ나들어 믿음의 아들로 키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내는 물론 자녀들과 애양원의 식구들 모두가 반대하면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통곡하였으나,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민족이라도 구원해야 할 터인데 동족끼리의 골육상잔은 민족의 비극이요, 국가의 참사입니다. 보복행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 민족, 이 동포가 이래 죽고 저래 죽으면 그 누가 남겠습니까? 그런즉 내 곧 사람을 보내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토록 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겠습니다.”

 

손 목사는 대한민국의 좌우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겪었고, 야수 같은 공산당에 의한 두 아들의 희생으로 그 아픔은 누구보다 컸습니다.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의 찢기는 아픔보다 좌우로 분열된 내 조국의 아픔을 먼저 보았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그의 별명은 기독인으로서의 사랑을 넘어 온 국민의 화합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그의 위대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보여 줍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동인·동신 두 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을 당하고, 그로부터 약 2년 후, 손 목사는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라는 주위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25년ㄱ나 동고동락했던 나환자들을 버려둔 채 내 일신의 안전만 도모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애양원에 머물다가 1950913일 공산군에게 검속되었습니다. 좁은 유치장에 갇힌 지 15일째인 928, 인민군은 여수에서 구금된 2백여 명의 우익인사를 모두 석방시켜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이끌고 도주하다가 여수시 둔덕동 과수원 골짜기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이때 손 목사도 총살당하여 48세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위 내용은 전남일보사에서 발행한 광복 30년사2권 여순반란편 207-234쪽에 실린 내용과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를 참고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15) 반란 지령을 내린 이중업 · 이재복

여수 14연대 사건은 군부대 안으로 침투한 좌익세력이 주동이 되어 제주도 폭동진압을 돕기 위해 출동하는 부대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지방 좌익세력과 동조자들을 가담하여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면서 여수 순천을 공산천하로 만들었습니다. 전군사상 유례 없는 이 군대 반란 사건의 배후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검은 지령이 있었습니다.

남로당의 군사담당 총책 이재복(1949.1.19.체포 당시 46)은 전군규모의 반란을 획책하고 조종하여 왔으나, 당시 각 연대의 좌익 세포조직이 아직 미약하여 전군 규모의 반란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실천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제주도 4. 3폭동사건은 제주도가 고립된 섬이기 때문에 폭도들은 본토에서의 호응을 기대할 수 없었고, 더구나 강력한 군의 토벌작전으로 반도들이 전멸될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재복은 때마침 제주도로 향발하는 제 14연대 내의 남로당 군사 조직책인 지창수 상사에게 반란을 지령하였던 것입니다.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는 제 14연대 인사계인 지창수 상사이고 김지회와 홍순석 중위는 반란 후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들은 군내에서 내선(內線)작전으로 음모를 계획하다가 제주도 출동의 호기를 포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남한 전반에 걸친 폭동 및 군부반란의 외선(外線) 총책임자는 평양신학교 출신인 이재복이었습니다. 이재복은 여수 순천 사건을 통해서 남로당특별공작 책임자이며 군내 최고의 적화 책임자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발생했다는 사실은, [동아일보 1949410일자]기사에서도 정확하게 확인됩니다.

... 본명 이중업(38)은 이중영 또는 김창선이라는 두 가지의 가명을 가져 박헌영의 콤그룹하의 주요인들의 인원으로 박(헌영)의 이월후 남로당 중앙조직부책임자 남로당 12개 전문부와 산하 23개 단체를 지도하며 남한 각군면 리단위로 정보를 수집하여 박헌영에게 전하는 한편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고 산하에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강화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바 남로당특수부책임자 이재복에게 지령하여 여수순천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순천승주 향토지는 순천·승주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이 책에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의 발발상황과 주도 인물 그리고 순천 지역 경찰과 우익세력의 학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책 107쪽에서 당시 여순반란을 지령한 총책은 남로당 특별 공작 책임자이며 군 적화책임자인 이재복(46, 평양 신학교 출실)이었다. 이재복의 반란 지령을 받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는 14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들을 포섭 음모를 꾸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송요순 붉은 대학살 (104)에서도 남로당 빨치산 군사책 이중업은 남로당원 이재복에게 여수 주둔 제 14연대에 침투해 있는 푸락치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재복은 제주도 폭동에 이어서 본토 내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군의 토벌병력을 단절 또는 분산시켜 우선 제주도의 위기를 감소시키려 하였고, 본토 내에서 제 2전선을 형성하여 전군적인 호응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의 전격적인 토벌작전으로 제 14연대의 반란군은 조기에 각개 격파 당하여 입산 공비화하였고, 뒤따라 전군적인 대숙군이 단행되어 그들의 군내 조직이 제거됨으로써 남로당이 3년간에 걸쳐서 대한민국정보를 전복하려던 꿈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여수 순천 사건으로 제 14연대는 19481028일부로 해체되는 동시 연대장 박승훈 중령은 파면되었고 연대 기간장교 중 피신하였던 장교들은 반란 부진압죄로 기소되어 대부분 처벌을 받았습니다.

 

 

 

2.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 부대의 연속된 반란

 

(1) 19481021, 전투사령부 설치

육본 총사령부에서는 반란군에 의해 온통 불바다가 되어 검은 연기로 뒤덮여 버린 여수와 순천의 위급한 상황을 전달받고, 19481021일 반군 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 총사령관인 송호성(宋虎聲) 준장을 임명하여 제 2, 5여단을 통괄 지휘케 하였고 제 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金白一) 대령을 임명하고, 각 부대의 지휘관을 정식 임명하여 진압작전을 지휘케 하였습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작전참모부는 14연대의 출동명령을 다짐해 놓았고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었는데, 곧이어 발생한 14연대 반란이라는 돌발적인 사태는, 태어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신생 정부를 벌집을 쑤셔놓은 듯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에 38선 경비 병력을 제외한 모든 출동 가능한 병력을 파악한 후에 광주 4연대, 군산 12연대, 전주 3연대, 마산 15연대, 대구 6연대 등에서 총 10개 대대를 진압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2) 19481023, 여수 순천 지구에 계엄령 선포

선발부대로 보냈던 광주 4연대가 반란군과 합류하는 것에 놀란 박기병 소령은, 여수 14연대 반란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폭동보다 더 순식간에 번질 위험성을 우려, 폭도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정일권 참모부장에게 계엄령 선포를 건의하였습니다. 정일권 참모부장은 이를 받아들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은 1023,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3) 광주 4연대 2대대 1중대의 반란

숨가쁜 진압부대의 움직임 속에 아군의 지휘관 중에는, 주어진 작전을 기피하거나 총부리를 반대로 돌려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반란 진압을 왔던 국군이 또 연이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광주 4연대의 반란, 마산 15연대장 최남근 중령의 반란, 대구 6연대 각 대대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원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편 이전에도 군 내부 사상불온자들에 의한 작은 반란이 종종 발생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1946523일 제 1연대 제 1대대 소요사건, 194610월 제 3연대장 배척사건, 194612우러 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대장 폭행사건, 1947229일 제 2연대장 부정불온사건, 194745일 제 8연대 제 3대대장 구타사건, 194761일 제 4연대 영암군경 충돌사건 등이 있습니다.

사각형입니다.

광주 4연대 2대대 1중대는 광주에서 제 1진으로 급파된 중대였습니다. 당시 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서울 출장 중이었으므로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이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박 소령은 반란 소식에 이어 여수 경찰서가 점령되었다는 마지막 통보를 받고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다고 판단, 미 고문관과 신속하게 합의한 후 우선 2대대의 1개 중대(중대장 전영근 중위)를 차출하여, 새벽 4시 트럭 2대에 분승하여 선발부대를 반란 현장으로 보냈습니다.

1020, 선발대가 광주를 떠날 때 박 소령은 반드시 학구(순천 북방 10km)를 경유하여 순천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반란군이 구례와 남원으로 빠져 나갈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하게도 보성과 벌교를 경유해 10시가 되어서야 순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반란군 지휘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순천역 방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남로당 세포원들이 “14연대 장병들은 우리와 함께 지내던 전우인데 어떻게 총질하느냐?”라고 선동하여, 대원들은 반란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14연대 반란군들은 광주 4연대의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기생 또는 상관이고 부하였으니 반란군에 대해 적대감을 갖지 말라고 남로당 세포원들이 미리 중대원을 유대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1개 중대 병력을 실은 트럭 2대가 순천 동외동 입구에 접근할 무렵, 갑자기 양쪽에서 무장군인들이 뛰쳐나와 총부리를 들이대고 길을 막았습니다. 깜짝 놀란 전영근 중위는 일단 읍내로 질주했다가 투항을 결정하고 백기(白旗)를 만들고는 홍순석 부대를 설득하려고 다가갔습니다. “(순석) 대위님, 웬일입니까? 우리끼리 싸움을...”이라고 말을 건넸으나, 눈에 핏발이 선 홍순석은 설득은커녕 전 중대원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3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투항에 불응한 자는 즉결 처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자는 유치장에 가두고, 투항한 자는 동무라고 부르면서 등을 두들겼습니다.

이때 희생된 국군은 이명은 소위 등 장교를 포함해 28명에 달했고, 나머지는 거의 투항하거나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뜻밖에도 반란군과 손을 잡은 30여 명은 순천중학교로 배치되어 반란군과 해동을 같이했습니다. 이때 장인호 소위는 현장에서 학살을 면하고 우체국으로 달려가 현지 상황을 광주 제 5여단에 보고했는데, 후에 김지회 일당에게 붙잡혀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한편 육군 총사령부에서 출동명령이 내려진 대전의 제 2여단은 단장 원용덕 대령의 지휘로 남원을 거쳐 순천 방면으로 향하고, 3, 12연대 일부도 여단장 기백일 대령에 의해 순천으로 진격하였으며, 특히 진압주력부대인 백인엽 소령의 12연대는 광주로 와서 4연대와 합류하고 마산 15연대는 이미 하동에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박기병 소령은 20일 밤 9, 광주 4연대 1개 대대를 이끌고 순천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고아주 4연대 선발부대가 반란군에 합류한 상황에서 사기가 떨어졌던 경찰부대는, 박기병 부대가 도착하자 사기가 충전했습니다. 당시 박기병 소령은 5(151.5cm) 단구였으나 그 용맹성으로 추앙을 받던 지휘관이었습니다.

4연대 병력과 경찰 병력은 순천의 관문인 학구 터널입구 양쪽 산을 끼고 배치됐습니다. 우선 최석준(崔錫俊) 특무상사를 보내 반란군을 부대 안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세웠는데, 박 소령의 작전이 적중하여 반란군 선발대들은 광주 4연대 선발대가 자신들에게 합류했던 점만 기억하고 경계를 소홀히 하여 최상사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진압군은 엎드려 매복해 있다가 최 상사를 앞세운 반란군이 근처에 다다랐을 때 16명을 생포하였습니다.

 

(4) 나주 주둔의 중대 반란(112)

여수 작전에 참가한 제 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은 나주 중대에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급거 나주로 복귀하였습니다. 전투사령부에서는 제 4연대 내에 좌익분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병력을 믿고 작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제 4연대의 출동대대에 광주집결을 명하였습니다. 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나주에 있는 1개 중대를 복귀시키기 위하여, 대대장 류정탁 대위(육사 2)에게 나주에 가서 김남근 중위(육사 3) 중대를 인솔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류 대위는 나주에 가서 김 중위를 만나 같이 점심을 먹고 연대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 중위는 세면도구나 가지고 갑시다하면서 대대장을 하숙집으로 유도한 후, 방문을 열면서 안에 두었던 M1소총으로 저격하여 어깨 관통상을 입히고 도주, 중대를 이끌고 입산하고 말았습니다. 나주경찰서를 통하여 이와 같은 연락을 받은 박기병 소령은, 일부 병력을 지휘하여 이들을 추격, 장성(長城) 북방 사거리 터널에서 완전 소탕하였습니다. 김남근 중위는 그 후의 토벌 작전때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였습니다.

 

 

(5) 군산 12연대 5중대장 김응록 중위 반란 음모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을 위해 투입된 광주 4연대(부연대장 박기병 소령)가 반란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은데다 반란군과의 전투 중 교착상태에 빠져 있을 때,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이 군산 12연대 2개 대대를 이끌고 도착하였습니다. 2대대(대대장 김희준 대위(와 제 3대대(대대장 이우성 대위)였습니다.

5여단장 김백일 대령은 부임 즉시 광주에 온 12연대의 백인엽 부대를 학구로 보내 3, 4연대와 합류토록 했습니다. 광주 4연대 박기병 부대가 전주로 방향을 돌리면서 연대장 이성가 중령이 지휘하는 후속부대가 학구를 점령 확보했습니다. 이에 따라 백인엽 소령이 이끄는 12연대(군산) 주력부대와 3연대(전주) 일부가 순천 시내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총지휘관 김백일 대령(5여단장)12연대 2대대장 김희준 대위, 3대대장 이우성 대위, 3연대 2대대의 조재미 대위 등에게 이제부터 시내로 진격하기 위해 ‘12연대 2대대는 봉화산 밑으로, 3대대는 가곡동, 난봉산 고지로, 그리고 3연대 2대대는 외곽 고지를 차단하면서 압축해 들어간다. ... , 절대로 양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2연대의 주공을 담당한 제 2대대의 김희준 대위가 순천의 봉화산 등성이를 오르고 있을 무렵 5중대장 김응록 중위(육사 3)에게 ‘5중대 전원은 도로를 진격하는 1개 중대의 엄호를 맡아라. 그러면서 계속 진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명을 받은 5중대가 3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중대장 김응록 중위의 상황보고가 들어왔는데, ‘중대원들이 작전을 거역하고 있으니 대대장이 직접 와서 수습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별로 치열한 총소리도 나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김희준 대대장은 본부요원과 함께 급히 출발했습니다. 김 대위 일행이 야산 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기관총 사격을 받았는데, 오연수 상사 등 몇 사람이 부상했고 김희준 대대장은 포복으로 겨우 야산 밑에 도달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면했습니다. 이는 김응록 중대장이 한 짓으로, 그는 고의적으로 작전을 기피하고 김희준 대대장이 오도록 유도하여 고의적으로 작전을 기피하고 김희준 대대장이 오도록 유도하여 기관총으로 그를 죽이고, 5중대를 반란군으로 만들어 12연대를 장악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김응록은 후에 계속 주목을 받다가 김희준 대대장에 의해 헌병대로 끌려가 김창룡에게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6) 마산 15연대 최남근 연대장, 반란 부대에 자진 투항

광주4연대가 출발한 지 2시간 후, 마산 15연대도 출발했습니다. 최남근이 직접 지휘하는 제 1대대는 먼저 하동, 광양 방면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최남근 연대장은 출발하면서 상황설명이나 훈시도 하지 않고, 심지어 실탄도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중대장들은 무엇 때문에 출동하는지조차 몰랐고, 더구나 처음으로 M1소총을 지급받은 간부들은 자동차 위에서 취급법을 교육받을 정도였습니다. 각 중대장은 모두 육사 4, 5기 출신 소위였고, 소대장으로 하사관이 선임되어 있었습니다. 하동에 도착했을 때 경찰로부터 반란군은 광양에서 하동을 향해 동진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이때 비로소 각 중대장은 출동목적을 알아차렸습니다.

중대장들은 혹시 반란군이 접근하면 쉽게 건널 수 없으니 빨리 섬진강을 건너서 전진하자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최남근 중령은 국군 주력과 함께 행동해야 하고 아직 반란군이 어디쯤인지 불명확한데다 얼마 있다 해가 진다는 것을 이유로, 하동에서 숙영하자고 하였습니다.

 

첨병중대인 제 3중대가 옥곡면의 S자 길인 광양 동쪽 8km 지점에 도착했을 때, 매복하고 있던 반란군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맨 먼저 중대장 손() 소위(육사 5)가 부상당했습니다. 여기서 제 1중대장 조시형 소위(육사 4)가 제 3중대를 지휘하여 도로 북쪽 고지를 점령하고 응전하기 시작하자 대대장 한진영 대위(육사 2, 나주 출신)가 그 고지로 달려왔습니다. 그곳에서 적정을 정찰한 후 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산을 내려가는 도중 반란군과 조우했는데, 반란군은 이미 제 3중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부대인가라고 묻는 반란군의 질문에, 한 대위가 나는 제 15연대 제 1대대장이다.’라고 답하는 순간 총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이 충격에 도망치는 장병이 많았고 이윽고 제 3중대는 반란군의 포위하에 빠졌습니다.

후방 뒷 고지에서 쌍안경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연대장 최남근은, 3중대가 포위당했으므로 전 부대가 위기에 빠졌다고 판단하여 각 중대에게 후퇴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런데 첨병중대가 승차하였던 차량 3대가 전방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연대장이 이를 철수시키겠다면 앞으로 나가자 제 1중대장 조시형 소위도 따라갔습니다. 자동차 주위에는 이미 반란군이 무리지어 있었는데 최남근 중령은 자기 부하들인 줄 알고 가까이 갔습니다. 조시형 소위가 반란군임을 알아차리고 연대장님 돌아갑시다라고 말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연대장과 조 소위는 반란군에게 체포당했습니다.

 

최남근 중령과 제 1중대장 조시형 소위가 행방불명되고, 대대장 한진영 대위가 전사했고, 3중대장 손 소위는 부상을 당해 대대에 남은 장교는 제 2중대장 손덕균 소위와 중화기 중대장 최내현(육사 5)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대장으로 최정호(육사 2) 대위가 부임해 왔으나 그는 적극적으로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최정호 대위는 전쟁 중 월북하였다고 합니다.

최남근 연대장은 마산에서 진압을 위해 광양까지 가는 동안 실탄을 지급하지 않았고, 상황설명을 세밀히 하지 않은 데다 반란 부대의 기습을 받자 반격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먼저 반란부대에 투항하였습니다. 차량 철수도 연대장이 직접 나설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모순된 행동은 기회가 있으면 1개 대대를 반란군과 합류시키려고 기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남근 중령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 북한으로 길일성 교육을 받고, 김일성의 지령을 받아 반공투사로 위장하여 월남, 경비대를 창설할 때 입대하여 고급장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머리도 좋았지만 인간미가 있어서 상관이나 동료나 부하들에게 선망받던 존재였습니다. 그 점을 적극 이용하여 각 부대를 전전하면서 군내의 좌익 세력 확장에 전력하였습니다. 그가 좌익이면서도 철저하게 우익으로 가장하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전혀 좌익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작고한 원로 저널리스트 박성환은 196520년의 공개 기자 수첩 파도는 내일도 친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최남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최남근은 만주 군관학교 출신으로서 8.15 후 군 창설기에 경비대에 입대한 자이며 공산당 군사부와 연결되어 있었고 군 내부의 공산세력 침투, 확장을 꾀하여 유사시에는 봉기할 태세를 갖춘 행동대에 속하는 공산당 중요 멤버였다. ... 그는 특수하게 조직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사에 숙고하는 성품이었다. 그러면서도 호탕한 행동을 곧잘 하는 성미이기도 했다. 밖으로는 부드럽게 보였으나 속은 누구 못지 않게 강인한 면이 있었다. ... 그는 대구 연대를 창설 조직하는 임무를 띠고 대구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대구 6연대는 반란군 진압 차 현지로 출동했으나, 최남근은 적극적인 출동 명령을 내리지 않고 출동 대대를 반란군 주력 앞에 노출시켜 놓은 채 김지회를 만자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1021, 최남근은 광양군 옥곡면 백운산 기슭에서 반란군과 대치 중에 김지회와 그 부대를 급히 만날 목적으로, 포로로 잡힌 것처럼 위장하여 반란군 진영으로 들어갔다가, 김지회를 만나고 5일만인 1027일 마치 결사적으로 탈출한 것처럼 위장하여 진압군 진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로 인해 뒤늦게 최남근의 정체는 완전히 탄로되었습니다. 1027일 행방불명되었던 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조시형 소위가 화개장(花開場)으로 돌아오자, 즉시 광주로 수송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 스스로 반군에게 합류한 것이 아니고 부대지휘 중 실수로 반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기회를 얻어 탈출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조사했던 김점곤 소령은 끈질기게 바른대로 말하라고 요구했으나, 과거 직속 상관이었던 최남근을 고문할 수 없어서 소득 없이 서울의 정보국으로 보냈습니다. 총사령부에서는 118일부로 최남근을 제 4연단(충북 청조) 참모장으로 전보 발령했습니다.

며칠 뒤 광주에서 서울로 철수한 김 소령은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게 인사 차 들렀는데, 그때 김 소령은 마침 미 CIC장교가 건네준 최남근에 대한 정보 자료를 내놓았고, 백선엽 중령은 김 소령이 준 봉투를 꺼내 보고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이에 즉시 최남근 체포령을 내렸고, 그는 대전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군법회의에 넘겨졌습니다. 군법회의에서 최 중령은 김지회 부대와 합류하였던 사실을 실토하였습니다. 최남근은 사형선고를 받고 1949526일 오후 2, 수색에서 총살되었습니다. 최남근의 사형 직전 모습을 박성환 파도는 내일도 친다()180쪽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수색의 형장에는 15연대의 고급장교 몇 명과 창군 당시부터의 옛 친구 몇 명이 입회하여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호걸 남아답게 담담하였으나, 마음속에 교차하는 깊은 감회를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옛날 친구들에게 술한 잔을 달라고 하여 쭉 들이키고 도 담배 한 대를 달라고 했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길게 담배 연기를 들이키고 다시 길게 내뿜으면서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한 대가 끝나면 사형이 집행되는 것이다.

담배 한 대가 거의 타갈 무렵 그는 담배를 내어던지면서 마지막으로 옛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졌어. 내가 너희들에게 졌어. 그런데 대한민국은 유망한 나라야. 장래가 있는 나라야. 너희들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라. 이 유망하고 장래가 있는 나라를 위하여 정말 충성을 다해 다오.” 웃음을 머금은 그의 얼굴은 한결 부드러웠으나 그러나 의연하게 말하였다.

 

 

(7) 대구 6연대 반란

대구 6연대 반란은, 건군 이후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세력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 중, 여수 14연대 반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군반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은 사건 발생 2년 전인 1946101일 대구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10.1대구폭동 사건 당시에 이미 시작되엇다고 할 수 있으며, 제주도 4.3폭동과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재복은 여수 14연대 반란에 이어 마지막으로 남로당 세포가 가장 많이 침투되어 있었던 대구 6연대에 기대를 걸고 반란 지령을 내렸습니다. 이재복이 연대세포조직책이자, 대구 6연대 인사계 선임하사관 곽종진 특무상사에게 반란지령을 내림으로써 대구 6연대가 3차에 걸쳐 연쇄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대구 6연대는 창설 이래 5대에 이르는 연대장 중에 김종석(3), 최남근(2,5) 등이 공산주의 불온사상을 가진 자들이며, 대원들도 해방 후 좌익 사설군사단체인 국군준비대 출신이 대부분이어서 사실상 좌익 군대나 다름없었습니다. 심지어 좌익사상을 갖지 않은 연대장은 이 연대에 오래 있을 수 없었습니다. 초대 창설 중대장인 김영환 참위가 제 1기하사관들인 좌익분자들에게 구타 당하여 축출되었고 제 2대 최남근, 3대 김종석 때에는 무사하였다가 제 4대가 좌익이 아닌 심언봉 부위가 불과 1개월 반을 복무하고 물러났으며, 5대에 다시 최남근이 재임하였습니다.

6연대에는 소위 대구 폭동사건(1946.10.1.)의 관련자들이 군대를 도피처로 삼아 다수 입대하여 있었기 때문에, 대내에 감도는 불온사상은 개개인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대구 6연대의 1차 반란(1948112)

대구 6연대의 경우, 제주 4.3사건 진압 차 1개 대대 파병, 14연대 반란 진압 차 1개 대대 파병, 김천에 1개 중대 파병, 포항에 1개 중대가 파병되었던 때라 잔류 병사가 200명뿐이었습니다.

1948112, 정보과 선임하사 이정택 상사와 곽종진 상사는 진압군 출동을 저지하라는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6연대 본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출동 중인 부대가 본부로 복귀할 것을 예상하고, 이렇게 되면 본부에 복귀한 각 부대 내의 좌익 세포들이 기회를 포착하여 연속으로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정택 상사는 112일 그의 상사인 김진위 대위에게, 곽종진 상사가 연대내의 남로당 세포책임자임을 계획적으로 밀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 대위는 그의 보좌관인 조장필 소위로 하여금 곽종진을 헌병대로 체포 연행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조 소위는 12:00시경에 지프차에 이정택 상사를 태우고 연대본부 인사과에 도착하여 곽종진 상사를 찾아 헌병대까지 임의동행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무렵 병기고 밖에서는 곽 상사의 수하들이 0.5촌 기관총과 기타 무기들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연대보급관인 이남주 소위가 보급차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러 나왔다가 이것을 보고 왜 병기들을 손질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출동부대에 보낼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편 곽 상사는 조 소위에게 모자를 쓰고 나올 테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하고 사무실에 들어갔고, 조 소위는 지프차에 탄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곽 상사는 야전잠바 주머니에 4.5구경권총을 넣고, 나오면서 조 소위를 배후에서 저격하여 사살하고 도주하다가 수송고나 이 소위도 사살하였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이정택 상사는 조 소위가 쓰러지자 여순반란군들이 대구에 쳐들어왔습니다.”고 외치면서 본부사병들을 탄약고 앞으로 집합시켰습니다. 본부에 있던 좌익세포들은 사전에 계획한 일이므로 손질을 하고 있던 병기로 즉시 무장하고 집합하였고, 그 밖의 사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탄약고 앞으로 집합하였는데, 연대장실 앞에서 조 소위와 수송관 이 소위가 쓰러져 있음을 목격하였습니다. 사병들이 집합하자 이정택 상사는 평소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하사관 10여 명을 호명하면서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호명된 자들이 나온 후 이정택 상사가 권총으로 이들을 사격하자 그의 일당도 합세하여 난사하였습니다. 이에 모여 있던 일부 병사들이 흩어지려고 하자, 위협사격을 하여 막았고 이중락 일등병은 손에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이 같은 돌격을 당한 부연대장 최경만 소령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 헌병대로 가서 헌병대장 김진위 대위(육사 3)와 더불어 헌병 40명을 지휘하여 연대본부로 달려왔는데, 100m 전방에 도달하였을 때, 3대대 소속 배상수 외 수십 명이 정문앞에 차를 세워 두고 헌병들을 기관총으로 기습사격하여 헌병 6명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바람에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최경만 부연대장이 즉시 미 1연대에 지원 요청을 하였고, 1연대의 전차가 출동하여 6연대를 포위하고 190여 명을 체포함으로서 사건이 수습되었습니다.

 

한편 이정택의 반군들은 지방폭도들과 같이 칠곡, 동명, 가산의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김천으로 향했는데, 김천에 주둔 중인 1개 중대와 합류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반군 일부가 사살되자, 팔공산으로 입산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정택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의 토벌 때 사살되었습니다.

 

대구 6연대 반란으로 조장필 소위 이하 장교 4명과 사병 4명이 피살되었고, 중경상자 5, 경찰 피해 4, 부근에 있던 남녀 10여명이 유탄(瑠彈)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제 3연단(부산) 참모장 이영순 중령은 법무장교 3명과 헌병 1개 소대를 지휘하여 대구에 도착, 1차로 400여 명의 장병들을 구속조사 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112명의 좌익세포를 색출하였고 군법회의를 통해 6명을 총살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유기형을 각각 선고하였습니다.

 

대구 6연대의 2차 반란(1대대 반란, 1948126)

대구 6연대의 제 1차 반란사건을 계기로 연대 본부 안에 있는 좌익분자들의 숙군은 단행되었으나, 지리산 방면에 출동 중인 부대에는 손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숙군을 위해 출동부대에 원대복귀를 명령하였습니다.

2개 중대 병력 380명을 지휘하여 연대로 복귀하던 차갑준 대위(1대대장)는 함양에서 출발하기에 앞서 실탄을 모두 회수하려 하였습니다. 좌익 장병들이 이 명령에 응하지 않자, 대대장이 연대 본부에 보고하여 대대가 고령에 도착하면 강제로 회수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연대 본부 자체에 병력이 없어 요청받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복귀부대가 12616:00 17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대대장 차갑준 대위의 선도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대구 달성군 월배 부근의 모퉁이 성당지에 이르렀을 때, 뒤따라오던 차량 1대가 뒤쳐져 따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대장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실을 확인코자 했는데, 아직 어둡지 않는데도 갑자기 라이트가 켜졌습니다. 이는 동 대대 인사계 이동백 상사가 전원 하차하여 제 4번 탄약차 앞으로 가서 실탄을 분배받으라고 하는 신호였습니다.

이동백 상사는 함양을 출발하기 전에 연대에 돌아가면 숙군될 것을 예상하고, 6연대 내의 세포들과 모의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그 장소로 대구 근교인 월배를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동백 상사는 각 차량에 분승하였던 장교 9명을 사살하고, 다른 대원들에게 반란에 호응할 것을 강요하자 하사관 28, 병사 14명 총 42명이 그들에게 가세하였고, 나머지의 사병들은 분산되어 대구시 대명동에 있는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 이동백 상사의 반군 일당들은 도주하면서 달성지서를 습격하였고 순식간에 탈주하여 팔공산 빨치산이 됐습니다.

 

대구 6연대의 2차 반란(1대대 반란, 1948126)

이듬해 1949130일 포항에서 오천 비행장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대구 6연대 제 4중대에서 다시 비슷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4중대의 경우 포항에서 기지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숙군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에 연대에서는 제 4중대의 숙군을 위하여 제 3중대와 임무교대를 계획하고 이 일을 극비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특급 비밀이, 한 남로당원에 의해 좌익 세포들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1차 반란에서 도주하여 입산한 곽종진, 이정택 일당들이 포항 주둔 제 4중대 재무계 선임하사관과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반란을 모의하였습니다.

1949130, 4중대 재무계 선임하사관이 중대 내 20명의 남로당원과 규합하여, 4중대장 이영삼 중위에게 술을 잔뜩 먹여 부대 지휘를 못하게 하고, 백달현 소대장과 하사관 1명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포항 지역의 일반 좌익분자들과 제 1차 반란자들을 대내로 진입시켜 무기고를 점령하는 동시에, 전 중대원에게 동조할 것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1, 2차 반란 사건의 숙군선풍을 눈앞에 보고 있던 터라 대원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반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46218일 대구시 중동 대구 6연대 창설을 주도한 하재팔(河在八)은 학병 소위 출신으로 남로당원이었습니다. 하재팔 소위는 당시 좌익 군사 단체였던 국군준비대에 소속된 자만 받고, 우익 단체의 청년들을 받지 않아 6연대를 남로당 연대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대구 폭동 이후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경비대에 들어오면 환영식을 해 줄 정도로 대구 6연대는 남로당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습니다. 연대장은 초대에 김영환 소위, 2대에 최남근 중위, 3대에 김종석 대위, 4대에 심언봉 중위, 5대에 다시 최남근 중위가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연대장 재임 기간은 김영환과 심언봉이 통틀어 몇 개월에 불과했고 남로당 군사부장인 김종석과 최남근이 26개월 동안 번갈아 맡았습니다. 김종석은 일본 육사 56기생으로, 이주하와 이재복 계열이었습니다.

6연대는 각 대대 중대가 각지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반란이 연쇄적으로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는 불순분자들만의 반동행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만일 6연대가 대구에 집결되어 있었다면 여수 순천사건 못지 않게 큰 폭동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육본에서는 대구 6연대를 아주 해체시키고, 22연대로 재편했습니다(1949415).

김지회와 홍순석의 반란군 주력은 순천에서 토벌부대에 쫓겨 구례 방면으로 이동하여 백운산으로 입산하였고, 광양 방면의 반란군도 백운산으로 일단 입산하였다가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유격 근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때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본의 아니게 반란에 가담하게 되어 반란군이란 누명을 쓰게 된 억울한 병사들(반란군의 거의 대부분)이제 경찰관을 응징하였으니 우리의 임무는 끝난 거 아니냐. 그러니 우리를 귀향시켜 달라.”고 간청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란 주동자들의 위협과 이미 반란군의 일원으로서 토벌대상이 되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입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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