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관교육

  • 홈 >
  • 커뮤니티 >
  • 국가관교육
국가관교육
근현대사3. 여수 14연대-반란(순천사건)(5) 운영자 2020-09-23
  • 추천 1
  • 댓글 0
  • 조회 282

http://ynfaith.com/bbs/bbsView/118/5799225

10.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과 부사령관 이영회

Lee Hyun-sang and Lee Young-hoe, the commander-in-chief and the deputy commander-in-chief, respectively, of the North Korean Partisan in South Korea

 

(1)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의 최후(1953917)

이현상은 1905927,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122번지, 아버지 이면배와 어머니 김행정의 42녀 중 다섯째로 출생하였습니다. 이면배는 군북면 제일의 부농으로 면장을 지낸 유지였습니다. 이현상은 어린 나이인 19202월 당시 전북 무주의 명문가 최 씨의 딸 성녀와 결혼하여 그가 졸업하던 해에 큰 딸(무영)을 낳았고, 이어서 문영, 상진, 아들 극()을 낳았습니다. 1925(20)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하였고(중앙고보 재학 시절),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전쟁 발발까지 빨치산 양성 학교인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지낸 박병률씨는 강동학원에서 지리산 빨치산 지도자인 이현상, 제주도 빨치산 지도자인 김달삼 등을 포함해서 빨치산 간부들을 교육시켰다고 말했습니다.

남로당에서 연락부장, 간부부장 겸 노동부장으로 일했는데, 남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하였다가, 1948년 북로당의 결정으로 다시 남한으로 내려와 여수 14연대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이현상은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으로 가고자 북상하다가, 전쟁 소식과 함께 다시 남하하라는 명령을 받아,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시 북으로 후퇴하던 중, 당의 지령을 받고 남하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으며, 1951년 북한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남한 빨치산 조직인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이 하루가 다르게 북상하여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게 되자, 1950927일 즈음, 마산창령 전선에 투입되었던 인민군 제 467910사단은 그들의 퇴로가 차단되고 풍비박산되었습니다. 이때 고립된 인민군은 2,3000명 넘게 사로잡혔고, 나머지 인민군 패잔병 10,000여 명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호남영남 지역의 지방공비와 합류하였고, 비정규전부대를 조직하여 후방 지역을 교란시켰습니다. 비정규전부대의 규모는 38도선 이북지역인 양구평강곡산양덕 일대에 약 10,000, 38도선 이남지역인 오대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 일대에 약 15,000명 정도였습니다. 지리산은 빨치산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세력과 규모가 대단했으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지방 공비들에게 전설적인 영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19537월 휴전 이후 빨치산은, 1953826일 제 5지구당 조직위원회를 열어 총책 이현상을 반당, 반국가적 파괴, 암해분자의 잔재로 비판 탄핵하였습니다(출당 및 모든 지위 박탈). 북한에서는 이미 박헌영 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921, 빨치산 제 5지구당 유격부 부장이었던 문남호(본명 오복덕)가 장안산 방면에 있던 전북도당으로 이동 중 생포되었을 때 소지하고 있었던 제 5지구당 결정서 9호와 10호에서 밝혀졌습니다. 이후 이현상은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약 두 달이 지난 1953917, 지리산 쌍계사의 의신리 빗점골에서 사살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김용식 경사가 지휘하는 서남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33명의 수색대에 의해 1953918일 오전 11, 지리산 쌍계사 의신리 빗점골 합수내 너덜바위에서 죽은 다섯 명의 공비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지리산 빨치산 수기 남부군(1988)의 저자 이태는, 당시 이현상의 사살이 워낙 큰 공로였기 때문에 군과 경찰은 이현상을 사살한 것은 서로 자기들이었다고 주장하여 1953121경 합동관계자회의를 열어 열띤 토론을 펼친 끝에 여론이 경찰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 이승만 정부는 경찰의 손을 들어 줬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다음 같은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당시 이현상의 시체를 부검한 남원 이동외과 병원의 군의관의 견해에 의하면 이현상의 시체에는 목에 집중적으로 8발의 총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근접사격에 의한 것으로 일종의 사후 확인 사살이었거나 목을 떼어내기 위하여 목둘레에 대고 집중사격을 가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현상의 사망은 교전 중에 사살된 것이 아니라 평양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그의 반대자인 방준표와 박영발의 명령을 받고 앞뒤에서 그를 호송하던 호송원 1명이 뒤에서 이현상을 사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당시 경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던 차일혁 총경도, 이현상 시체에 대해 총알이 정확하게 뒤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쏜 것 같다.”는 김용식 경사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로 보아 이현상은 토벌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에 따른 여파로 평당원으로 강등된 다음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같은 고향 출신 친구인 유진산 등 지인들이 찾아와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 준다는 명목으로 창경궁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하였고,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 인수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숨진 이현상의 시신은 토벌군 측의 차일혁 총경이 섬진강에서 화장하여 한 줌의 재가 되었고, 섬진강 다리 밑 하동 송림 주변 백사장에서 한 스님의 독경과 더불어 강에 뿌려졌습니다.

이현상이 사살된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은 완전히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병으로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갔습니다. 매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이현상이 빨치산 총사령관으로서 약 5년간 지리산 유격전투를 주름잡으며 온갖 고난과 풍상을 이겨냈음에도, 그가 태양처럼 모시고 충성했던 김일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면, 그 말로가 너무도 억울하고 비참한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커다란 인적, 물적 피해를 끼치며 고통을 주었던 그가, 끝내는 북으로부터 배신당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북한은 평야의 열사묘에 이현상의 가묘를 만들고 리현상 동지-남조선 혁명가, 1905927일생, 1953917일 전사라는 묘비를 세워 놓고 있습니다.

 

이현상은 죽을 때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이었습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漢詩)가 적힌 수첩과 가래가 있었고, 호주머니에서는 염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허리춤 깊숙이 소련제 소형권총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권총은 매우 작아서 호신용으로나 쓸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급을 전혀 받지 못했던 빨치산들에게 특수 소제 권총은 실탄을 구할 수가 없어서 무기로는 전혀 가치가 없었습니다.

 

다음은 이현상 시신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한시입니다.

智理風雲堂鴻動 지리산에 풍운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 남쪽으로 천리 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伺時非祖國 오직 한 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

胸有萬甲心有血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이 한시의 내용을 볼 때 이현상은 자신이 믿고 따랐던 공산주의 이념을 죽을 때까지 고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무엇하나 제대로 정착된 것 없는 이데올로기의 혼란기에,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으로 194811월 지리산에 들어간 이후 약 5년 동안, 이현상은 빨치산의 두목으로서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것이 조국을 향해 뜨거운 열정을 쏟아 애국하는 길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토록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는데도 말입니다. “오직 한 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지리산에서 5년간 그 고생을 하고 김일성의 손에 허망하게 죽어 가면서도,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조국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는 사실에 실로 가슴 저미는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비록 저 빨치산 두목이 생각한 애국애족과 이상이 우리와 다르지만, 오늘날 발전된 나라와 민족 앞에 우리의 애국애족의 마음이 그의 절반도 안 된다면, 이것은 양심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 참혹한 동족상잔을 일으킨 불시가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소중한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에 속아 빨치산이 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일으킨 주역이 되어 끝내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허망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동족상잔의 비극을 반드시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2) 부사령관 이영회의 최후(19531127)

(경남 의령 경찰서 습격 사건, 19531123)

남부군 사령과 이현상이 죽은 뒤 다른 지도자들의 운명도 시시각각 좁혀오는 토벌대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하나둘씩 떨어지며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경남 도당을 지휘했던 부사령관 이영회의 부대도 이현상이 죽은 지 두 달 열흘 만에 후속토벌대에 의해 전멸했습니다.

이영회는 여수 14연대의 상사 출신으로 14연대 반란의 핵심적 인물이었습니다. 이영회는 1949년 김지회가 죽은 후 반란군을 흡수하여 부대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는 제 2병단 시절 연대장을 지냈고 57사단장으로 경남도당 유격대를 진두지휘했으며, 이현상에 대해 남다른 충성심을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15월 덕유산 송치골 회의를 통해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을 통합하여 남부군이라는 대규모 부대로 개편할 때, 이영회는 부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총사령관: 이현상). 당시 이영회 부대는 지리산 공비들 중에서 최강의 정예부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19531123, 이영회 부대는 국군으로 가장하여 경남 의령 경찰서를 습격하고자 의령군 화정면 유수리 고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영회 부대는 고개에 대기하면서 정찰대원 세 명을 의령 읍내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영회 부대는, 때마침 진주에서 의령으로 향하고 있던 육군 GMC 한 대와 거기에 타고 있던 현역 군인 한 명을 납치했습니다. 이어서 의령에서 진주로 향하던 민간인 트럭 한 대와 타고 있던 육군헌병 한 명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후 430분경, 이영회 부대는 탈취한 두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현역 군인과 헌병을 각각 태워 의령읍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의령 경찰서에는 30명의 본서 직원이 있었으나 그날이 의령시의 날인 관계로 20여 명의 직원들이 시내에 있었고, 본서에는 서장 이하 10명만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55, 빨치산들이 분승한 두 대의 트럭이 의령 경찰서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빨치산들은 입초 경찰관에거 서장 있느냐?”는 질문과 동시에 일제히 사격을 가했습니다. 경찰서 안에서 근무하고 있던 경찰관들은 빨치산들의 불시 습격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의령 경찰서장은 서장실에서 빨치산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경찰서를 순식간에 점령한 이영회 부대는 유치장에 수감중인 피의자(병역기피자 6)들을 석방한 뒤에 경찰서를 방화해 버렸습니다. 이어 시내 관공서 등 중요 건물과 창고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는 등 두 시간 가까이 만행을 저지른 뒤에 오후 7시 경에 이미 탈취한 한 대의 트럭을 타고 용덕 방면으로 도주했습니다. 오후 730분경 이영회 부대는 다시 용덕 지서를 습격, 방화한 후 계속 도주했습니다. 그러나 진트재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하차할 수밖에 없게 되자 타고 왔던 트럭을 방화한 후에 도보로 정곡 방면으로 이동했습니다.

1130분경, 빨치산들은 정곡 지서를 습격했습니다. 지서 직원들은 이에 응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빨치산들은 지서와 면사무소, 금융조합 그리고 주차 중인 트럭 한 대를 방화하고 한 대를 탈취했습니다. 이영회 부대는 다시 트럭을 타고 다음 날 자정 30분경에 유곡면 송산리를 통과하여 새벽 130분경에는 정곡 부락에 도착했습니다. 이영회 부대는 정곡 부락에서 취식 후에 새벽 440분경에 정곡면 백계리를 경유, 서골산 방면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의령서 습격으로 인한 피해 상황은 경찰 전사 5, 민간인 피살 1, 중경상 3, 납치 9(경찰관 2, 군인 2, 민간인 5명 전원생환) 등을 비롯하여 경찰서, 군청 등 건물 48동이 소실되었습니다.

 

서골산 방면으로 도주한 이영회 부대는 지리산으로 입산하던 중 1127, 신등면 사정리 북방 4km 지점에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5연대에 파견됐던 2연대 수색조의 매복에 걸려, 극렬한 전투 끝에 이영회가 죽고 방상종이 생포됐습니다. 당시 이영회는 25세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경찰 5연대와 2연대 수색조는, 이영회가 의령 경찰서장을 죽이고 빼앗아 차고 있던 오메가 손목시계를 증거물로 확보했습니다.

이영회의 시체를 직접 지게에 싣고 갔던 박성종씨의 증언에 의하면, 죽은 이영회는 붉은 색이 도는 가죽모자(귀싸개 부착)를 쓰고 있었으며, 검은색 가죽잠바와 당꼬바지에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탄띠에는 비어 있는 권총집과 대검을 부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영회는 19세 때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광주 4연대에서 야포를 담당하다가 여수 14연대로 전속된 후 여순 반란사건을 맞아 중대를 이끌고 반란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는 지리산에 입산한 후 유격전의 귀신이라고 불리울만큼 실전에 능한 자였습니다. 이영회에게는 옥순이라는 이름의 산 중 애인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것을 비판하자 내 나이 스물에 입산해서 풍찬노숙, 사람답게 살아 본 적이 하루도 없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 뻔하다. 내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한 한 사람의 여인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이영회의 죽음과 함께 지리산 주변, 인 남한 전역의 빨치산 부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어서 닥쳐온 겨울, 빨치산은 거의 소멸되어 갔습니다.

(3) 허망하게 죽어간 빨치산 간부들

6.25전쟁 이후 빨치산들은, 이남에서 가장 따뜻하고 은신처가 많은 지리산을 은거지로 삼아 세력을 규합하고, 군경과 민간인들에게 많은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를 주었습니다. 1953년까지 6년 동안 1만 회가 넘는 교전을 벌였고, 죽은 사람만 해도 2만여 명이 넘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게릴라전이었습니다. 빨치산 중에는 여러 걸출한 인물이 있었는데, 이현상, 하준수, 이영회, 김지회, 홍순석, 방준표, 박종하, 박영발, 노영호, 김삼홍(본명 김병인)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한때 호남과 지리산 지구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빨치산 간부들은 빠짐없이 생포되거나 사살되어 전멸하였습니다.

 

19531127, 이현상 이후 빨치산 대장을 맡았던 이영회가 죽고, 그 뒤 로 빨치산 대장을 맡은 엘리트 출신 노영호(서울 공대 건축과)1954년 지리 산 홍계리 산자락에서 죽었습니다.

19541월 중순, 5지구당 유격 지도부장을 지낸 박찬봉은 제 5지구당 해 체 후 경남 북부 소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기백산에 은신해 있었는데, 경찰 수 색대에 습격당해 사살되었습니다.

19541월 중순, 전남 도당 위원장으로 방준표와 나란히 이현상 숙청에 앞장 섰던 박영발, 뱀사골에서 35연대 수색대에 포위되었을 때 자결했습니다.

1954131, 5지구당 해체 이후 서남지구 빨치산들을 총지휘했던 전 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 남덕유산의 아지트에서 박병권 전투사령부 5사단 36연대(연대장 김동혁 대령)에 맞서 끝가지 저항하다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 으로 자폭하였습니다.

195426, 경남도당 위원장을 맡았던 조병하가 지리산에서 5사단 수색 대에 생포됐습니다. 그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해 1954517일 남원의 군 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당시 52).

1954227, 오랫동안 전남 도당 유격대를 지휘했던 김선우는 광양 백 운산 아지트를 습격받자 수류탄으로 자결했습니다.

1954년 여름,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삼홍(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은 제 5지구 당 해체 후 지하 잠입을 위해 하산하여(195311) 부산으로 숨어 들었다 가 1954114일 검거됐습니다.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계속 복역하다가 1988년 풀려나 19892월 요로암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당시 73).

경남도당(지리산 지구)최후의 7(김희준이은조이홍이지동선이용순이재봉정순덕)만이 남아, 계속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해에 정순덕과 함께 유일 한 여 빨치산이었던 이용순이 전향하고(1954년 겨울), 이재봉이 토벌대에 잡혀죽고(19541110), 김희준과 지동선도 이재봉에 이어 차례대로 토 벌대에 잡혀 죽었습니다.

영남과 강원도 일대에서 잔비들을 규합해 보급 투쟁으로 양민을 괴롭히던 남도부(본명 하준수)1954년 생포됨으로써, 남한 전역의 빨치산 지도자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영위하던 공비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541일 현재 남한 전역에는 59명의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19561231에도 43명이 산간을 떠도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이들은 세력이 너무도 약화되어 더 이상 치안을 위협하는 빨치산이 아니라, 밤에 살금살금 내려와 민가에서 먹을 것을 빼앗아 가는 살쾡이 같은 생활로 연명해 갈 분이었습니다.

경남도당(지리산 지구) 가운데 끈질기게 남아 있던 최후의 3인 중 이은조는 함양군 유림면 엄청강변 송대골 복숭아 과수원 뒤에서 함양 경찰서 사찰과 소속 임채호 순경과 두 명의 의용 경찰이 쏜 총에 맞아 48세에 죽었습니다(1961년 겨울).

 

(4) 마지막 빨치산 최후 2, 정순덕()과 이홍이()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것은 19631112일 새벽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내원사 계곡에서였습니다. 경찰이 정순덕의 정보원이었던 먼 친척을 회유하여 치밀한 작전을 세운 끝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정순덕은 잠복 중이던 김영구, 박기수에게 우측 대퇴부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습니다.

정순덕은 이홍이와 남녀 2인조로 움직였는데 이날 이홍이가 사살되었습니다. 이홍이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 북촌 마을 출신으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남로당에 가입하면 실컷 공부를 시켜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가담하였습니다.

정순덕은 아버지 정주삼과 어머니 진도원의 14녀 가운데 둘째 딸로, 1933620(음력)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녀는 농촌에서 자라난 무식한 아녀자로 1950517세에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18세의 성석조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간 것을 계기로 13년 동안 산에서 짐승같은 생활을 한 것입니다. 생포될 때 정순덕의 나이 30세였습니다. 그의 남편은 19521월 지리산 대성리 계곡에서 토벌대에 의해 죽었습니다.

 

남로당은 제주 4.3사건과 여순 반란 사건 등을 계기로 무모한 유격 투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194812월 국가보안법이 통과되면서 19497월부터는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유격 투쟁을 위해 인민유격대를 편성하였습니다. 남로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이미 남한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북한 권력층에 납득시키기 위해 유격투쟁을 무리하게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북로당)은 그것을 전쟁을 위한 보조적인 가치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남로당이 무기와 탄약의 공급을 요청하였을 때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장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바로 남한의 빨치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일성과 박헌영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는 일에 이용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수년간 그렇게 오랜 세월 지리산에서 산짐승 같은 생활을 견디며 추위와 굶주림으로 허망하게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에게 이미 등을 돌린 정신적 지주들에게 맹목적인 충성만을 외쳤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자들입니까? 그들은 결국 공산주의에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아 모두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체포로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부록. 민족 중흥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오랜 가난을 벗고 자립경제자주국방세계 속의 한국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든, 우리 민족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 중흥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19615.16군사혁면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5대부터 제 9대까지(1963-1979) 대통령을 역임하였습니다. 19791026일 향년 61세로 서거하여,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 출생과 성장 배경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에 너무도 깊고 짙은 자취를 남긴 분입니다.

박 대통령은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대구사범대를 졸업하고 문경보통공립학교에서 3년간 교사생활을 하였습니다.

1940년 만주군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학, 발군의 실력을 보여 19423월 졸업생 450명 중 1등으로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1944년에는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후,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았습니다.

1944년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일본 관동군 635부대의 소위가 되었고, 1년 만인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 제 3지대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 2중대장으로 194658일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의 형 박상희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고 있었으면 됐을 것인데 제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하며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46924,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기생으로 입학했습니다(당시 29, 입학생 총 263).

 

2. 역사의 소용돌이와 군 생활의 시련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1946101, 가장 존경했던 셋째 형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대구 10.1폭동 사건 당시 103일 오전 9, 선산군의 좌익들이 구미 경찰서에 들어가서 배상철 서장에게 경찰 권한을 넘기라고 난동을 부릴 때,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던 것입니다. 이때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끌어들인 인물이 대구 사람 이재복입니다. 이재복은 일제 시대 평양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으면서도,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남로당 군사부 총책을 맡은 자였습니다. 그는 평소 박상희와 가까이 지내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하였고, 박상희는 당시 시대가 어렵고 집안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쉽게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대구 10.1폭동 때 박상희가 죽자 이재복은 형 박상희의 장례비용을 모두 대주고 그의 유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에게 접근하여 자기와 함께 일하면 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하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하였습니다. 이때 박정희는 이재복에게 따뜻한 인간미를 느껴 큰 감명을 받고 남로당에 가입하여 좌익이 되었고, 이재복은 박정희에게 국군 내의 남로당 세포조직을 총괄하는 군사부장이라는 간부직을 맡겼습니다.

한편 이재복은 대구에 주둔 중이던 제 6연대의 최남근 연대장을 포섭하여 군 내 남로당 간부로 만들었는데, 최남근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선배로서 서로 친숙한 사이였으며, 8연대 중대장 시절에는 박정희가 연대장으로 모신 상사였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 때문에 이재복, 최남근, 박정희 등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바로 박정희가 남로당원이 된 배경입니다.

이후 박정희는 1947927일 중위를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하여 제 8연대에서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황택림 중위가 1중대 2구대장이며, 강창선 대위가 2중대장, 김학림 대위가 2중대 2구대장으로 있으면서 박정희 대위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군대 내의 남로당원으로 강창선이 두목이었으며, 박정희가 술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를 포섭하기 위해 매일같이 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과 자주 어울리다가 친분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동조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2010년 구미시 발행 민족영웅 박정희 대통령 일대기에서 발췌.

 

박정희는 194881일자로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그해 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초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으로 취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후 군부내 남로당 세력에 대한 일대 검거가 시작되어 19481111일 박정희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한 달 남짓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을 붙잡아 군내 좌익 세포 명단을 통째로 입수하였는데, 그 명단 속에 박정희 소령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특무대 김창룡의 조사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고 194928일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200여 명의 남로당 명단을 제시하는 조건으로 무기징역, 파면, 급료 몰수형 등을 차례로 받으면서,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습니다. 이때 박정희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그의 조선경비하관학교 2기 동기생이었던 김안일 방첩과장과 백선엽 정보국장이었습니다. 이들은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중요한 군사책을 맡은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이 아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게 알려준 점을 들어 그의 구명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사형 집행에서는 면제되었으나. 대신 파면 명령이 떨어져 그때부터 현역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19506.25전쟁 발발 이후 박정희는 그해 914일 복직되어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915일 중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의 수송지휘를 맡았습니다.

 

3. 철저한 반공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1,2,313년 재임, 1948.7-1960.4)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이념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 경제적으로는 아무 기반도 없는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려고 군사 교육 경제 등 각 방면으로 혼신을 다해 나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6.25동란 직후에 또다시 빈털터리가 되었고, 가장 비참해진 것은 배고픈 국민들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것이 부족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우리나라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는 오로지 미국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57년부터는 세계 경제에 불황이 닥치고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어 한국 경제에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6.25동족상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지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여서, 나라 곳곳에는 잿더미가 수북하고 길거리에는 구걸하는 상이용사와 어린아이들, 부모 잃은 고아들이 넘쳐났습니다. 자식 잃은 노모와 남편 잃은 미망인의 한서린 울부짖음도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전쟁으로 두들겨 맞은 상흔(傷痕)으로 신음했고, 온 국민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며 굶주리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때 이승만 정부는 19603.15부정선거 감행으로 이승만이 88.7%, 이기붕이 79%를 득표하여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하여 일어난 학생과 시민의 규탄시위가 마산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411일에는 마산 시위 중 실종되었던 중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는데, 이 사건으로 시위는 거센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4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시위를 벌였고, 마침내 419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비롯한 서울시민 10만 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중 일부가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자,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서울 지역에 선포하고, 계엄군을 출동시켜 학생시위를 저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이날 하루 동안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고 6천여 명이 부상당하였습니다. 425일에는 대학교수 300여 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시내를 행진하며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결굴 4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 장면 내각이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출범하였으나 국민들로부터 무능한 정부로 손가락질을 당했고, 사회불안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4.19때 부상당한 젊은이들과 유가족은 발포책임자에게 내린 판결에 대한 불만을 갖고, 국회 해산을 외치면서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의장석을 점거하는 일까지 벌였습니다. 또한 군부 내에서도 젊은 장교들이 의견을 모아 문란해진 군의 질서를 바로잡고,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장면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거절 당하자 군의 불만이 점점 높아갔고, 다시 1960910일 육군의 영관급 중견장교 11명을 중심으로 국방부 장관을 만나 군의 정화를 건의하고자 했으나 면담조차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장교들은 시내 충무장에 모여 무력혁명도 고려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196147일 저녁, 명동 강상욱 중령의 집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혁명 주체세력의 전체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 작전 및 행전 책임을 비롯한 연락책임 등 각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처음에 419일로 정한 거사일이 기밀 누설로 516일로 변경되었습니다.

 

마침내 1961516일 새벽 2, 한강을 넘어 서울로 들어온 박정희가 이끄는 3천여 병력(해병대, 공수단, 23사단)은 서울 진압을 저지하려는 헌병들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3시간 후 군인들은 중아청과 방송국을 점령하고 새벽 5시 첫 방송으로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면서 6개 항목의 혁명 공약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박정희의 철저한 반공 의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6개항 혁명공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국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렴한 기품을 진작( : 떨쳐 일어남)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당일 오전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의장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부의장은 박정희였습니다. 피신해 있던 장면 국무총리는 518일 국무회의를 열고 내각총사퇴와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결의를 했고, 대통령 윤보선이 이를 재가했습니다.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맥그루더장군은 군사혁명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윤보선 대통령에게 혁명군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내각책임제하의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내각이 이미 무기력해졌음을 감지하고 군사쿠데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장면 총리는 내각 총 사퇴와 혁명위원회에의 정권이양을 결의하였고, 윤보선 대통령도 혁명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협조를 호소함으로써 혁명이 공식적으로 공인되었습니다. 이후 52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박정희를 의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는 제일 먼저 미국방문과 한일회담 재개에 나섰습니다. 미국의 확고한 지지, 일본과의 관계 개선, 이 두 가지가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경제개발계획이 차질 없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도록 물적 지원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9627,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새 헌법을 만들어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는데, 당시 지도력을 인정받아 새롭게 발탁된 사람들은 육사 8기생을 주축으로 하는 있었습니다.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여 1962127일 통과시켰고, 196310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민정당의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127일 제 3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4.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

 

(1) ‘신사 광부서독 파견 광부와 코리안 엔젤서독 파견 간호사

박 대통령은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1962년 역사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나, 극심한 외자(外資)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혁명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주던 원조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아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고, 호텔에서 짐을 싸면서 서러움에 복받쳐 한없이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당시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당시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독일(당시 서독)로 달려가 차고나 제공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 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 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가장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독일은 대한민국에서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줄 것을 약속받고, 14,000만 마르크를 빌려주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뽑혀온 광부들은 독일의 탄광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힘들어도 눈물을 참아가며 지하의 좁은 갱 속에서 일하였습니다. 지하 1,000m3,000m 사이 막장에서 1m씩 파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습니다. 딱한 사정은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이 처음 맡은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GNP2%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정부 차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공공차관이 중단된 1982년까지 총 59000만 마르크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1960년대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떠난 지 1년 만인 19641210일 오전, 서독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 회사 본관 앞에서 신사복 차림의 500여 명의 광부들과 색동저고리 차림의 50여 간호사들이 좌우에 줄을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독일을 방문중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고, 그 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실내에 차츰 커지던 함창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목부터는 가사는 잘 안들리고 목멘 소리만 간신히 들릴 뿐이었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습니다. 저들은 대통령 내외를 모고 친부모를 만난 듯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배곯고 있는 내 나라의 처참한 가난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서러움이 북받쳤던 것입니다. 취재 기자들도 카메라를 놓고 주저앉아 통곡했고, 독일인 광산회사 사장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지난 후, 함보른 광산회사 테드 호르스트 영업 부장이 나와 한 나라 국가원수가 이곳을 찾아 준 이 역사적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한국인 광부들의 근면과 성실을 칭찬하는 내용의 환영사를 읽었고, 식장의 분위기는 겨우 진정이 되었습니다. 이어진 위로 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 하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대통령의 신분도 잊은 채 광부들과 간호사들과 함께 소리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은 떠나는 승용차 안에서까지 내가 죄인이라면서 계속 눈물을 훔쳤고, 옆 자리에 앉았던 뤼브게 서독 대통령은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라고 하며 손수건을 건네주고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광부들 대부분은 지하 1,000m 채탄 작업 중 부러진 드릴이 튀어오르는 바람에 얼굴, , 다리 등이 상처투성이였다고 합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우리 국민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만들겠다.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 간호사 44, 기능공 8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작업 중에 사망한 광부가 27, 자살한 광부가 4,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 었습니다.

당시 통역관으로 박 대통령을 수행했던 백영훈(전 국회의원)씨는 그날의 일이 자신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그때 박 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한편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 첫날, 본에서 쾰른으로 이동하는 20km 구간의 아우토반’(Autobahn)을 지나면서 도전받은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첫 고속도로인 서울-인천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기도 했습니다(197077).

위 내용은 김충배 장군이 2003년 육사교장 시절 육사생도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발췌.

 

 

(2) 새마을운동과 국가 건설

새마을운동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을 몰아내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일으킨 범국민운동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1970422일 전국 지방장관 회의에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 부른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발전도, 복지 국가 건설도, 평화 통일 달성도 어느 의미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빨리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풍요와 번영을 이룩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남의 힘이 아닌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온 국민이 함께 노력해서 가난을 추방하고 이 땅에 잘 사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이다.”라고 그 취지를 밝혔습니다.

정부는 197056일 새마을운동 추진방안을 수립하고, 그 첫 단계로 농촌환경정비 사업을 시작하여 1개 리·(·)에 시멘트 335부대를 지원하고 이를 이용해서 농촌 주민 스스로가 환경개선 사업을 펴도록 했는데, 주로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새마을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는데, 특히 가난과 침체의 상징이던 우리 농촌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일신되고, 농민들의 생활과 의식도 눈에 띄게 변화되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지 10년도 안 되는 짧은 세월 안에, 농촌의 낮은 초가지붕과 좁고 비뚤어진 촌길 등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현대적인 마을과 정리된 논밭, 부락과 부락으로 통하는 확 트인 농로, 공동우물과 공동수도가 농민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졌으며 마을마다 전기가 들어갔습니다. 우리 농민들이 땀 흘려 일한 보람으로 농가의 소득과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대되어 처음으로 쌀의 자급이 이루어지고, 그 일부는 이웃 나라에 수출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남녀노소가 함께 괭이나 호미를 들고 밤낮으로 흙투성이가 되어 일했으며, 엄동설한과 비바람 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일하고 또 일하는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제 4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77년 이후로는 새마을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 문화적인 농촌을 만드는 대규모 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당초의 계획보다 훨씬 빨리 1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하고 쌀의 자급자족을 이룩하는 한편, 건국 후 처음으로 국제수지에서 흑자를 보는 등 연이은 경제 발전의 새이정표를 세워 나갔습니다.

새마을은 단순히 자연 부락이나 행정 단위의 동()같은 마을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과 현대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옛마을이 아니라 새마을인 것이며, 농촌과 도시는 물론 공장과 회사 그리고 학교 등, 사람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구현될 수 있는 하나의 인간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기업체 내의 공장 새마을운동도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겨레가 지켜온 인화와 협동의 전통을 바탕으로 거대한 조직 생활 속에서 기업인과 종업원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을 눈에 띄게 향상시켜 경제의 고도성장과 국력 배양을 가속화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도시에서도 새마을운동과 새마음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또한 가정과 직장과 이웃에서 손쉬운 일부터 함께 실천하는 가운데, 건전하고 인정 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풍요한 산업사회를 세우는 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세계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이룬 급속한 경제발전은,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온 국민이 확고한 자주성의 바탕 위에서 함께 울고 함께 땀 흘려 일한 결과입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고,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여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팔고,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만들어서 외국에 팔아, 1965년 수출 12억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실로 우리나라는 배고픔과 가난, 거듭된 시련을 한데 뭉친힘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해 왔고, 이후로 값지고 빛나는 전진을 이루어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하는 등 세계는 지금 우리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발전된 조국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는 대한민국 중에, 그 당시 밥 먹듯했던 보릿고개’(준비했던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여물기 전인 4, 5월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의 설움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불과 50년 전, 대통령내외 앞에서 한없이 흐느끼며 애국가를 불렀던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의 설움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 또한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린 오늘의 한국이 무척이나 걱정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발전되는 역사, 올라가는 역사만 기억하고, 수치스러웠던 역사, 내려갔던 역사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국민은 잊고 싶은 바로 그 역사를 반드시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것이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입니다. 피와 눈물과 땀에 젖은 뼈아픈 역사를 모르면 그 역사 속에서 숨쉬던 수고와 희생도 기억에서 잊혀지기 마련이고, 거기서 배은(背恩)의 역사가 시작되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나라에서 입고 쓰고 먹고 누리는 일체의 혜택은 엄밀히 말해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피와 눈물과 땀으로 뿌려 두었던 수많은 희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희생 터전을 기억하는 자라면, 사리사욕만 채우면서 사치풍조 속에 휩쓸려 허랑방탕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나라를 위한 모든 수고와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할 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싹터 올라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충성하는 국민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근현대사4. 잊을 수 없는 6.25전쟁(1) 운영자 2020.09.23 1 382
다음글 근현대사3. 여수 14연대-반란(순천사건)(4) 운영자 2020.09.23 1 447